감귤, 인삼·우황·사향과 함께 최상급 효능 지녀
감귤, 인삼·우황·사향과 함께 최상급 효능 지녀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1.0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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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3>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2)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고려시대 때 감귤이 제주에서만 났다고 할지언정, 감귤나무가 육지부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군데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고려의 문신 이인로(1152~1220)가 지은 시화집 ‘파한집(破閑集)’을 보면, 어화원(御花苑)에 높이가 한길(3m 정도)이나 되는 귤나무가 있고, 열매도 많이 맺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어화원은 개경의 궁궐 북쪽에 위치했거니와, 왕의 후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파한집’에는 후대 곽예가 어화원의 귤나무를 읊은 ‘영귤수(詠橘樹)’라는 시도 덧붙여 실렸다. 시문에는 “동정귤(洞庭橘)의 향기가 줄어들지 않았으니”라는 내용도 보인다.

고려 때 귤나무가 개경의 궁궐에서도 재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개경의 귤나무는 왕의 후원을 돌보는 관리가 아침마다 염수(鹽水, 소금물)로 뿌리를 관리하는 등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던 것으로 봐 왕실 구성원, 혹은 연회와 행사 때의 관상용으로 심었다고 하겠다. 더욱이 이 귤나무는 중국의 따뜻한 남쪽 바닷가 지방에서 건너왔다는 내용도 나온다.

제주 감귤나무의 경우도 고려 때 한반도 육지부로 건너간 적이 있기는 했다. 감귤이 희소가치가 있었기에 감귤나무가 뇌물로도 쓰였던 것이다. 1280년대 임정기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을 때 왕명으로 전라도 방향으로 시찰을 나갔다. 이때 감귤나무 두 그루를 취해 이를 왕에게 바치고자 12마리 소로 끌게 해 궁궐까지 가져왔으나, 시일이 너무 오래 걸려 나무가 말라죽었다. 임정기도 말라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왕에게 감귤나무를 보여 점수를 따고자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제주에 와 감귤나무를 취했거나, 아니면 제주에서 이미 전라도 지역으로 넘어온 것을 얻었을 듯싶다.

1회에 이어 지금까지 제주가 고려시대부터 ‘동의보감’이 편찬되던 1613년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감귤 산출지였음은 문헌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한편 귤의 껍질, 곧 귤피(橘皮)는 한의학의 본초학(本草學) 전문서로도 자주 인용되는 중국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도 인삼·우황·사향과 함께 가장 좋은 등급의 약초로 올라가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4~3세기부터 계속 첨가·수정되면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 나오는 감귤이 약초로서 지녔던 가치와 그 정보는 옛적부터 우리나라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더욱이 고려시대의 의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은 사람들이 쉽게 알고 얻을 수 있는 약물은 모두 수록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제주 사람의 감귤재배가 항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고려시대 들어와서는 제주 감귤이 한의학이나, 혹은 민간요법에서도 이용됐을 듯싶다. 그럼에도 고려시대의 경우는 제주 감귤을 과일로 먹었다는 사실은 보이나, 약초로도 실제 썼던 구체적 사례는 아직 찾지 못했다. 이 가운데 제주 감귤류는 각각 청귤·동정귤·유자·등(橙)이라고 일컫는 4가지 품종이 확인된다. 이는 18세기 말 무렵에 거론하는 제주 감귤류의 15가지 품종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편이다.

여태 고려시대 때 제주 감귤류의 품종은 4가지 밖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들은 모두 ‘동의보감’에 등재됐다. 이들 외에 제주 감귤류로서 ‘동의보감’에 올라간 품종은 유감자(乳柑子)와 지각이라는 2가지에 그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 감귤류 가운데 약초로서 약리적 효과가 컸음이 아주 오랜 세월동안의 한의학적 임상을 통해 드러난 품종만을 대표적으로 거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청귤·동정귤·유자·등의 제주 감귤류는 고려시대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약용작물로도 이용·활용됐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다.

물론 제주 감귤이 약초로서도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동의보감’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제주 감귤의 수요도 ‘동의보감’이 편찬·간행된 1613년 이후부터는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한편 조선 정부는 장기간에 걸쳐 제주 이외의 곳으로도 감귤 산출지를 확대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얘기하고자 한다.

 

 

▲감(柑)과 귤(橘)의 껍질인 귤피-“오랜 시간 혼용된 감과 귤…약재 쓸 땐 성분·맛 따져야”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감(柑)과 귤(橘)은 그 ‘귤피’가 모두 한약재로 사용된다. 이들의 경우는 무엇이 다를까?

소동파(蘇東坡)는 11세기 후반 무렵 항저우(杭州)로 좌천된 이후 많은 시를 썼다. 이 가운데 지역 명물인 황감(黃柑)으로 빚은 술과 함께 대접을 받고, “귤을 먹는 즐거움이 신선됨에 뒤지지 않는다(橘中之樂 不減商山…)”고 읊은 시도 있다. 여기서는 감을 귤이라 하고 있다.

한편 기원전 한대(漢代)의 공안국(孔安國) 경우는 “귤과 유자는 모두 감이다(橘…柚皆爲柑也)”고 했다. 곧, 감(柑)은 ‘감귤 모양의 열매 중 감귤속(Citrus屬)’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 3세기 후반 이후 진(晉)의 혜함은 “감은 귤에 속한다(柑乃橘之屬)”고 해 감을 감귤(mandarin)류로 분류했다. 당대(唐代) 8세기 초반 이후부터는 감귤이 감과 귤로 완전히 나뉜다.

특히 송대(宋代) 12세기 후반에는 감 8종, 귤 14종으로 세분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명대(明代) 16세기 후반 이후에도 감과 귤을 혼용한다. 그래서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쓰면서 “귤, 유(柚), 감의 3가지는 서로 비슷한 무리이지만 같지 않음으로 이와 같이 분류해야 잘못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이와 같은 분류’라는 것은 형태와 기미(氣味)로 나누는 방식을 뜻한다. 그는 귤·유·감을 열매의 크기와 색깔, 과육의 맛을 기준으로 나눴고 껍질의 두께와 맛으로도 분류했다. 이를 보면 “귤피는 얇으며 맛은 맵고 쓰다, 감피는 약간 더 두껍고 맛은 맵고 달다(橘…皮薄…味辛而苦, 柑…皮稍厚…味辛而甘)”고 했다.

종래 감피·귤피는 서로 구별되기도 했으나, 현재 한국·중국에서 ‘귤피’는 감피와 귤피가 서로 구별 없이 유통되고 있다. 이는 시중에서 온주밀감(溫州蜜柑)을 온주밀귤이나, 혹은 온주감귤로 일컫는 예에서도 엿보인다.

요컨대 ‘귤피’를 약재로 쓰려 할 때는 감피와 귤피를 택하되, 이들 중 약리적 성분의 함량을 따짐과 함께, 껍질의 맛이 맵고 쓴 쪽을 고름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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