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微子)는 떠나고
미자(微子)는 떠나고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09.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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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제주일보] 전에 없이 뜨거운 여름이었다. 여름이면 으레 ‘폭염(暴炎)’이라는 말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여름은 세계기상기구(WMO)에서 ‘기상관측사상 가장 더운 해’로 발표했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이 저만치 물러간 자리에 선선한 바람과 함께 한가위가 성큼 다가왔다. 한가위에는 누가 뭐래도 ‘달’이다. 휘영청 밝은 달은 정월 대보름에도 좋지만, 그 넉넉한 모양이 팔월 한가위에 마침맞다.

이런 달을 보면서 옛사람은 오히려 기울어질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만물이 왕성하면 쇠퇴하고, 달도 차면 기운다(物盛則衰 月滿則虧)’고 넌지시 말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면 청량한 가을이 오고, 청량한 가을 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이 가득 차오르면 이내 기울어진다. 이게 자연의 위대한 이치다.

자연의 위대한 이치는 인사(人事)에도 적용된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편에서는 주공(周公)이 아들인 노공(魯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는 친족(親)을 버리지 않고, 대신(大臣)들이 쓰이지 않아서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예전부터 오래 알던 사람(故舊)은 크나큰 이유가 없으면 버리지 않고, 한 사람(一人)에게 모든 것을 갖추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인사에는 신의(信義)가 최고의 덕목이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 요즘말로는 ‘마이너스 정치’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마이너스 정치를 하다보면 결국 누구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여름 내내 뜨겁게 달구어져, 지금까지도 식지 않고 있는 인사 문제를 주공이 말한 ‘신의’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중용(中庸) 20장의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원칙(九經)’에는 주공이 신의를 말한 이유가 구체적으로 풀이되어 있다. “친족을 친하게 대하면 부모의 형제들과 나의 형제들이 원망하지 않는다. 대신을 공경하면 현혹되지 않을 수 있고,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면 선비들이 보답하는 일이 많아진다.”

그런데 이 중용구경 가운데 첫 번째로 손꼽히는 것은 수신(修身)이다. 수신이 전제돼 있기 때문에 신의와 관련된 나머지 것들이 천박한 정치술로 전락하지 않는다. 고대국가의 정치가들이 오늘날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받았다는 사실은 늘 새롭다. 겉치레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올바른 정치 이념을 표방하면서, 타인과 사물을 대할 때 늘 격식을 갖춰야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논어 미자 편은 “미자는 떠나고,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간(諫)하다가 죽었다 하니, 공자께서는 은나라에 인자(仁者) 셋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은나라의 진정한 지도자 셋으로 손꼽힌 미자는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紂)의 이복형, 기자와 비간은 숙부이다.

이 셋은 수신은커녕 친족을 친족으로 대하지 않은 주왕에게 충심으로 간언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자는 은나라를 떠났고, 기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체했으며, 비간은 간언을 멈추지 않다가 주왕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미자는 자신의 절개를 지키려고 했고, 기자는 임금의 죄악을 드러내어서 의로운 사람으로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비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염려했던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을 도덕경 44장에서는 ‘만족할 줄을 알면 수치를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대놓고 말한다. 헌법 제1조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인 신의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헌법 제1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주공의 시대에도 신의는 수신을 전제로 했다. 그렇지 않은 신의는 맹종이나 담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자가 떠나고, 기자가 미친 체하고, 비간이 목숨을 버린 까닭은 친족인 주왕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번 한가위에는 비간이나 기자만 못하더라도 미자처럼 떠나는 뒷모습이 굳건한 인자(仁者)가 한 명쯤은 있으면 하는 바람을 휘영청 밝은 달에 대고 빌어야 하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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