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일주일에 몇 번 부모가 보고싶을까?
아이는 일주일에 몇 번 부모가 보고싶을까?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08.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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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숙 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숙명여대·가천대 외래교수

[제주일보] 바위씨와 연두씨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다. 연두씨의 큰 웃음, 상냥한 태도가 바위씨 마음에 쏙 들었다. 바위씨의 말 없음, 남자다운 추진력이 연두씨 마음을 사로 잡았다. 후에 ‘꿈 같은 시간’이라고 표현할 만큼 서로 둘도 없이 좋았다.

그러다 바위씨의 일이 어려워지고 자꾸 여기저기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왔다. 연두씨는 그런 일들을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처리하는 바위씨의 말 없음과 독단성이 되려 아주 큰 단점이 돼 두 사람은 자주 싸웠다. 그리고 이혼을 선택했다. 둘 사이 아들 푸른이는 연두씨가 맡기로 했다. 이혼만 하기로 했지, 이혼의 내용들을 진중하게 이야기 하지 못했던 두 사람은 일단 아이는 연두씨가 키우기로 한 것이다.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 이혼 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두 사람은 아이를 번갈아 맡기도 하면서 자주 접촉을 했다. 그러다 양육비가 안 들어 오네, 아이를 맡기곤 너무 늦게 들어오네 하며 다시 싸움이 잦아졌고 바위씨가 이사를 하며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서로 못본 지 2년 정도가 지난 무렵, 연두씨는 바람결에 바위씨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아이가 자신에게 있고 경제적으로 조금 상황이 나아지면 바로 연락이 올거라 생각했던 연두씨는 충격을 받았고 바위씨가 너무 괘씸했다. 그래서 수소문 해 바위씨의 거처를 알아낸 후 푸른이를 그 곳에 두고 와 버렸다. 그때가 푸른이 7살, 푸른이를 두고 오면서 연두씨는 바위씨에게 얘기 했다. “내년에 푸른이 학교갈 때 데리러 올게. 일 년만 부탁해” 라고.

필자가 바위씨, 연두씨, 푸른이를 만나게 된 것은 2년 정도 후 푸른이가 9살이 되던 해였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데리러 가겠다던 연두씨는 ‘터전을 마련하느라’ 약속했던 1년을 넘긴 2년 후에야 푸른이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이를 데리고 오기는커녕 만나게 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법원에서 면접교섭 이행명령 소송을 시작했고 이에 맞서 바위씨는 연두씨에게 있던 푸른이의 친권, 양육권 변경 소송 시작한 것이다.

양육 환경이 자주 바뀐 경험이 있고 근 2년동안 친엄마를 보지 못했던 푸른이는 과연 어떤 마음일지, 앞으로 어떻게 부모와 만나기 시작하고 과연 어느 곳에서 자라는 것이 안정적일지 ‘아이 입장’에서 봐달라고 재판부에서 필자에게 상담명령을 내렸다.

상담을 시작해 보니 연두씨도 그동안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재혼가정을 꾸렸다. 푸른이는 이제 엄마, 아빠, 새아빠, 새엄마가 있는 가정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헤어진 부모와 자녀의 면접교섭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못봤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설명없이 상황을 맞이한 아이는 한쪽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십중팔구 그리 생각한다. 더군다나 자신을 양육하고 있는 부모와 헤어진 부모 사이의 갈등을 경험했던 터라 아이는 자기 때문에 부모가 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된 부모들은 이혼으로 아이가 더 큰 고통을 받고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이제 조심하게 된다. 살피게 된다. 자신과 상대방 사이의 갈등이 아이에게 가장 큰 불안을 조성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바위씨와 연두씨도 이러한 아이 심리를 이해하고 나서 자신들이 양육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엄마와 아이의 면접교섭부터 차근차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도처에 걸림돌은 산재했다. 연두씨는 품에 안고 자던 아이라 당장이라도 아이와의 1박은 당연하다고 주장했고 바위씨는 새아빠도 있는 낯선 환경에 아이를 재울 수는 없다고 맞섰다.

그럼 과연 아이는 하루에, 일주일에, 한 달에 몇 번 부모가 보고 싶을까?

아이에게 경제적, 정서적 지원을 해주는 부모는 아이 입장에서는 생존이다.

하지만 부모가 말로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모들이 서로 아이를 두고 싸워 버리면 그 갈등 구조 속에 놓인 아이는 생존이 파괴되는 것이다.

부모 각자의 주장을 경험해야 했던 푸른이는 상담 초기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였다. 금세 소변을 보고 와도 다시 또 소변이 마려웠고 조금 있으면 배가 아파왔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나서야 부모는 각자의 주장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부모는 공기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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