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제주일보
  • 승인 2016.06.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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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영 수필가

예전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확실하게 비가 내렸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고 나면 꽃이 새롭게 피었다. 다음 계절을 불러주는 비도 있는가 하면 주위의 모습을 변화 시켜버리는 비도 있었다. 언제나 분명했다. 하늘에 오래 머물러 있다 세차게 땅위를 씻어 내리던 장맛비.

만추의 비는 단 하룻밤만으로도 진눈깨비를 동반했다. 이른 봄의 비는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고 눈 깜작할 사이에 초록의 향연을 보여주었다.

여자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 때 머리를 자르거나 모양을 바꾼다고 한다. 그렇듯 비도 대자연의 무대를 다시 칠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소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의 비는 사뭇 다르다. 풍정이 물드는 걸 거부한다. 계절의 바뀜을 알리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다.

‘서머셋 모옴’의 ‘비’라는 소설이 있다. 그 속에 그려진 남태평양의 비는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의 양식(良識),종교, 밸런스 감각. 그런 모든 걸 쓸어버리는 비. 그 어떤 것도, 그 모든 것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비가 거기엔 그려져 있다.

‘서머셋 모옴’의 그 ‘비’를 읽으면서 처음엔 소설이니까 하고 넘겼다. 그러나 점점 나도 한 번 그처럼 강력한 비의 폭력에 접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수년 전, 그 소설의 현장 타이티의 모레아 섬에 갈 기회가 있었다.

높게 오른 산. 그 일각의 검은 구름으로 뒤 덥혀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그 풍광은 나를 압도하다 못해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런가 싶더니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팔다리의 가죽이 벗겨 지는듯한 아픔이었다. 빗방울이 아니라 차라리 작은 돌멩이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럽고 무섭게 내려쳐서 피부의 감각을 잃을 정도였다.

타이티 섬의 비는 아팠다. 쓰라렸다. 빗소리도 내 귀에는 뺨을 후려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물론 그 뜨겁고 아프던 타이티섬의 비를 제주에선 아직 본 적은 없다.

그러나 태풍이 올 때마다 저 남태평양의 비를 떠올린다. 가끔 살갗이 벗겨지는 듯 했던 기억. 그 비가 그리워질 때도 있다. 그리운 건 그 비뿐만이 아니다. 내 기억의 원풍경. 계절이 바뀌던 제주의 그 비가 그립다.

이젠 장맛비라고 해도 예전 같지가 않다. ‘예전 같지 않다’는 뜻은 ‘로맨틱’함을 잃었다는 뜻에서의 의미다. 꽃피우는 봄비. 시원하게 더위를 식혀주던 여름 한때의 소낙비 우산 속 가을비. 겨울을 재촉하던 입김서림 비. 그 비엔 냄새가 있었다. 제주 원풍경의 추억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젠 비가 무섭다. 세계 각국에서 물난리로 몸살을 겪고 있는 그 비를 생각하면, 차라리 무섭고 우울하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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