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자연 진지 ‘수리항’ 가득 채운 전복·우럭 양식장 ‘눈길’
천혜의 자연 진지 ‘수리항’ 가득 채운 전복·우럭 양식장 ‘눈길’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11.2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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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 우럭의 고장 대둔도(大屯島)
양식장이 길게 늘어선 수리항, 항아리 모양 깊게 형성되어 있고 너머가 다물도다.
양식장이 길게 늘어선 수리항, 항아리 모양 깊게 형성되어 있고 너머가 다물도다.

# 마을 연결하는 가파른 언덕에 ‘헉헉’

흑산군도 중 높은 언덕을 지녔다는 대둔도(大屯島)는 다물도와 이웃에 있다. 언덕이 높다 해서 섬에 높은 산이 있는가 했으나 높은 산은 없지만 3개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걸어보면 높은 언덕을 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단다. 배 시간표를 살펴보니 대둔도 가는 배가 1시에 있고, 돌아오는 배가 오후 6시에 있으니 5시간 동안 섬에 머물 수 있어 충분히 취재할 수 있을 것 같아 배를 탔다. 다물도 갈 때 만났던 선장이 “언제 나오느냐. 오늘은 오후 배가 없는 요일”이란다. 민박집 사정을 물었더니 전화를 몇 군데 해보곤 전부 만원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장이 여기저기 전화를 해도 마땅한 곳이 없다고 걱정하는데 마침 대둔도 수리 마을에 사는 우체부가 흑산도에서 우편물을 받고 대둔도로 들어가려고 배를 탔다. 선장이 잘 아는 사이라 사정을 이야기해 방 하나를 빌렸다. 저녁 식사는 해 줄 수 없고 방만 사용하라는 것이다. 정 안되면 굶을 생각으로 대둔도 수리 항에 도착했다.

천연지형이 항아리 모양 깊게 형성된 수리항, 외항에서 내항 깊숙한 곳까지 전복과 우럭양식 가두리시설이 꽉 들어찼다. “마을 정자에 앉아 있으면 금방 온다”는 선장 말을 듣고 정자에 갔더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쉬고 있다. “오메 이 더운디 어디서 뭐하러 오셨소” 한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한다. “제주도에서 섬 구경 왔습니다”, “제주도요. 저 아줌매도 제주도 인디. 고향분 만났네요” 얼른 보아도 제주 사람임을 느낄 수 있는 여인이 “제주도 어디 꽈. 난 성산인디”, “예 전 가시리 살암수다” 제주도 사투리가 오갔다. 제주에서 흑산도 출가 해녀로 왔다가 인연이 되어 이 섬에 시집온지 40년이 다 됐다는 고정윤씨, 지금 고향에 형제가 있어 가끔 고향을 찾는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눴다.

짐을 풀고 대둔도에 3개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수리에서 돈목리를 거쳐 오리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거의 기다시피 걷고 있다. 오전에 장도 습지 갔을 때 직각에 가까운 능선길을 2시간이나 오르내렸더니 서서 걷기가 힘들 정도다. 왜 도로를 이렇게 가파르게 만들었을까. 조금만 깎아도 덜 가파를 텐데. 이래서 대둔도 언덕이 가파르다 소문이 났구나. 오늘 너무 욕심부렸나. 이렇게 강행을 하지 않으면 섬 하나 취재하는데 이틀 또는 3일이 소요되니 무리를 안 할 수도 없고, 어느 새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대둔도 오리마을 앞 반원형 선착장은 태풍이 불 때면 인근 섬 주변 가두리 양식시설이 이 선착장으로 피항오기도 한다
대둔도 오리마을 앞 반원형 선착장은 태풍이 불 때면 인근 섬 주변 가두리 양식시설이 이 선착장으로 피항오기도 한다

# 주변 선박 피항지 반원형 포구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서자 멀리 다물도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다물도에 갔을 때 대둔도가 그림 같더니, 복숭아 골로도 불리는 돈목리 마을로 내려가는 길가에 그물들이 길게 깔려있다. 왜 그물을 길가에 깔아놨을까? 궁금했는데 이 그물은 고기잡는 그물이 아닌 양식장에 사용하는 그물로 각종 해조류를 벗겨내기 위해 길에 깔아놨다고 한다. 급경사에 지그재그 길을 내려서자 돈목리 승천교회다. 섬에 있는 교회로는 상당히 큰 규모라 놀랐다. 1959년 장기실 전도사가 도목리에 들어와 승천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장 전도사는 조산원 자격증과 침술에도 실력이 있어 의원도 없는 외딴섬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했었다. 그런 연유로 대둔도 세 개 마을에 교회가 있고, 성당도 있다.

2009년 기준으로 어업가구 당 평균소득이 9000만원 소득을 올렸던 부자 마을 대둔도가 양식업이 점차 사양길로 들어서면서 지금은 사정이 조금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돈목 마을을 보면 어느 섬 지역 어촌마을 같지 않게 집들이 호화롭다. 교회건물도 그렇지만 일반 가정집들도 붉은벽돌로 지어 이웃 수리나 오리마을 집들보다 화려하게 보인다. 아까 타고 온 엔젤호는 이 포구에 정박하는 모양이다. 포구 입구 커다란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어 가 보고 싶지만 한참 가야 할 것 같아 그냥 오리마을로 향했다. 오르고 내려 도착한 오리마을, 목섬이라는 무인도와 연결된 반원형 포구에 여러 척의 고기 배들이 한가롭게 떠 있다. 이 해안은 곳곳에 만과 갑이 발달해 드나듦이 심한 편이라 역동적인 해안으로 태풍이 올라올 때면 주변 양식장 가두리를 통째로 끌고 오는 태풍안전지대로 수심이 깊고 적조가 없어 양식장 조건으론 최고라고 적고 있다.

대둔도가 나은 인물로 수리마을 김이수 선생을 꼽는다. 흑산도에까지 널리 알려진 김이수 선생은 조선왕조실로에 의하면 정조 15년. 흑산도 백성이 닥나무세금 폐단으로 인한 원통함을 징을 쳐 호소해 이를 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섬사람들에게 고등어세, 기와세와 닥나무 산지라는 명목으로 부과된 종이세는 가장 힘든 부역이었다. 김이수는 흑산도 주민들이 겪고 있던 가장 큰 폐단인 닥나무 세금을 시정 하기 위해 관청이나 상부에 수차례 상소로 시정을 요구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최후수단으로 한양까지 찾아가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격쟁(擊錚)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에 정조는 상세히 조사할 것을 명해 1791년 4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섬사람들에게 영원히 종이상납을 혁파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작지만 큰 섬 대둔도, 1박2일 짧은 시간을 머물렀지만 오랜 시간을 머문 듯 따뜻한 정을 안고 발길을 돌리고 있다. <서재철 본사 객원 大기자>

마을 정자 아래 모여앉은 주민들.
마을 정자 아래 모여앉은 주민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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