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형 디아스포라를 위한 한 마디
제주형 디아스포라를 위한 한 마디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7.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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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 칼럼니스트

몇 달째 잠을 못 잔다.

단지 잠을 못 자는 수준이 아니라 누워있기도 힘이 들어 한밤중 서너 시에 집 밖을 떠돌기가 일쑤다. 몸이 지쳐 쓰러져 잠이 들기를 청하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취객이거나 무언가 위협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혹은 말로만 듣던 몽유병 환자거나.

남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나는 많은 밤 이질적 세상을 접하며 경계 밖을 서성이는 느낌이다.

한밤중에 거의 눈을 감다시피 걷다 보면 자동차에 부딪히거나 애꿎은 담벼락에 가로막히거나 전봇대가 코앞에 다가오기 일쑤다.

나는 철저히 혼자이며 가끔 길거리에 인기척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 역시 나를 멀찍이 피해 간다. 나는 그 와중에 아침의 정상적인 생활을 기대한다.

포도 뮤지엄에서 열린 두 번째 기획전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라는 전시를 다녀왔다. 개별 작가의 작품을 설명할 일은 없지만, 기획 의도에 적힌 “디아스포라와 다양한 층위의 소수자가 처한 소외와 어려움에 공감하고”라는 문구가 시선을 붙잡는다.

갑자기 매일 밤 계속되는 수면 부족의 공포에서 세상에서 소외되거나 주변으로 떨어져 버린 수많은 인생의 문제가 생각 속으로 들어왔다. 무슨 개인의 수면 부족이 본토를 떠나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 잡은 집단을 지칭하는 디아스포라와 연결되냐며 견강부회를 외칠 분들도 계실 터이다.

의미 여부를 떠나 나와 세상의 분리는 당연한 일이고 세상의 주류가 바뀌고 언제나 발생하는 주변부의 어려움은 쉽게 외면되는 약자의 영역이 되어버린 지 오래됐다.

제주에서 스스로 주변부로 전락한 수많은 외지인들을 보며 상호 분리가 약자의 영역도 있지만, 공동체로 일컬어지는 ‘같이의 가치’와 어울린다는 생각은 조금 멀게 느껴진다.

경계를 나누면 누군가는 늘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는 일이 일어난다는 작가의 멘트도 수긍할 만한 당위성이 있으니 선 긋기를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나부터 수많은 사회적 기호가 겉모습에 부여되고 그것을 위주로 불리고 인식된다.

그 안에서 내가 맺는 타인과의 유대는 직함으로 남고 진정한 관계에 대해서는 어려운 일이다.

매년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넘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에게 러버덕(노란색 작은 오리 인형)이 수백 개씩 수거된단다.

목숨을 걸고 사막과 국경을 넘는 다음 사람들에게 길을 잃지 말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정표다. 

누군가에게 흔적을 남겨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배려를 하려는 의지를 보면 우리 안에는 디아스포라를 위한 배려는 어느 정도일까 생각해본다.

이미 수많은 주변 집단이 제주 공동체의 테두리 안으로 꽤나 급속히, 그리고 강하게 접근하고 있다. 다문화사회이거나 육지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이 대다수다.

이주민들만 하더라도 도시를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집단, 반백수부터 인생 말년을 보내는 중년층, 새로운 직장 구성원 등 다양한 층위들이 알게 모르게 집단을 형성하거나 형성 중이다.

그들에게 궁금해지는 것은 다음 사람들을 위한 러버덕을 우리는 남겨놓고 있는 걸까.

제주 공동체는 그들을 언제쯤 제주의 경계 안으로 편입시킬 것인가.

여전히 3대가 살아야 제주인이 되고 십 년을 살아도 주변을 맴도는 이주민들에게 제주 공동체의 테두리에 포함될 문호가 어떻게 문화적으로 열려있는지 궁금하다. 전시 내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제주는 낯선 디아스포라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주민들이 그다음 이주자를 위해 준비한 러버덕은 무엇일까. 있기는 한 것일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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