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개무량”…애서가가 남긴 소중한 책들과의 인연 기록
“감개무량”…애서가가 남긴 소중한 책들과의 인연 기록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12.0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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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기(藏書記)와 필사본 대학(大學)

11살 때 필사본 75세에 발견, 기쁨 고백
소장 내력·사연과 관련 기사 스크랩까지
책 소중히 아껴온 마음 씀씀이 느껴져
왼쪽부터 ‘초천자문(草千字文 1911)’ 필사본 ‘대학(大學 1910)’ ‘국역 추사필체반야심경(秋史筆體般若心經 1955)’.
왼쪽부터 ‘초천자문(草千字文 1911)’ 필사본 ‘대학(大學 1910)’ ‘국역 추사필체반야심경(秋史筆體般若心經 1955)’.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다. 그 때 한창 한·중 문화교류사 관련 사료를 모을 때였는데 한 가지 인상적인 자료를 만난 적이 있다. 바로 원(元)나라의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이제현 초상’(李齊賢肖像, 국보 110호)에 실린 익재(益齋) 선생의 화제(畵題)다. 본인의 초상화에 스스로 화제를 남긴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화제에 따르면 33세였던 익재는 당시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중국 강절(江浙) 지방에 갔었는데, 그 때 충선왕이 진감여를 불러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후에 이 초상화를 남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린 후 소재를 모르다가, 32년 후에 사신으로 북경에 갔다가 다시 찾게 된 사연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초상화를 30여 년 만에 머나먼 이국타향에서 만난 기쁨과 놀라움을 적었던 선생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나곤 한다.

필사본 ‘대학(大學 1910)’ 첫 부분.
필사본 ‘대학(大學 1910)’ 첫 부분.

이렇듯 어떤 사연이 있는 물건에 관련 기록을 남기는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다. 책에도 그 책을 소장하게 된 내력 등을 적은 장서기(藏書記)가 있는 책들이 종종 있다. 이런 장서기는 아무래도 그 책을 소장했던 주인의 취향이나 성격이 반영되지만, 그 중에서도 본인과 좀 더 인연이 있는 책에 보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기록되기 마련일 것이다. 오늘은 두어 달 전 우리 서점에 입수된 도내 애서가(愛書家) 한 분이 소장하셨던 책 몇 권을 소개해 보련다.

먼저 필사본 ‘대학(大學)’이다. 옛날 서당의 필수 아이템이었던 까닭에 필사된 ‘대학’은 아주 흔한 고서지만, 이 책의 특별함은 소장자가 직접 필사했고 또 언제 쓴 것인지 알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장서기에 따르면 소장자가 용담(龍潭) 신교동(新校洞)의 송규병(宋奎柄) 사숙(私塾)에 다니던 11살 때 직접 쓴 책으로, 강산이 여러 번 변하고도 남을 64년의 세월이 지난 75세 때 발견해서 기록한 것이다. 역산해 보면 1910년에 필사한 ‘대학’으로, 이 책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감개무량(感慨無量)’이라 고백하고 있다.

필사본 ‘대학(大學 1910)’ 장서기(藏書記) 부분.
필사본 ‘대학(大學 1910)’ 장서기(藏書記) 부분.

두 번째 책은 1911년 전주 서계서포(西溪書舖)에서 출판한 한석봉(韓石峯)의 ‘초천자문(草千字文)’이다. 장서기에 따르면 이 책은 19살 때(1918) 여행 중 대구경찰서 앞 신구(新舊)서포에서 구입한 것으로 이 또한 75세 때 발견해서 기록을 남긴 것이다. 한석봉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까지 해 놓아 소장자의 이 책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초천자문(草千字文 1911)’ 장서기(藏書記) 부분.

마지막으로는 1955년 진주 영남문학회에서 발행한 ‘국역 추사필체반야심경(秋史筆體般若心經)’으로, 당시 제주 관음사 주지였던 서경보(徐京保) 스님이 편(編)한 것이다. 제주도 한학자 고성주(高性柱) 선생이 진장(珍藏)하고 있던 추사의 반야심경을 새긴 목판을 관음사 신도들의 시주로 출판한 것(비매품)으로 소장자가 법원장 재직 시절 목판 소장자로부터 직접 양수(讓受) 받은 책이다.

‘국역 추사필체반야심경(秋史筆體般若心經 1955)’ 장서기(藏書記) 부분.

원본을 잘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 모두 두툼한 종이로 장정을 새롭게 하고, 직접 필사한 ‘대학’과 ‘심경’에는 본인의 사진까지 부착해 놓을 것을 보면 소장자가 이 책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잘 알 수 있으리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겐 만나면 ‘감개무량’한 책이 얼마나 있을까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국역 추사필체반야심경(秋史筆體般若心經 1955)’ 내용 일부.
‘국역 추사필체반야심경(秋史筆體般若心經 1955)’ 내용 일부.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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