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옷’ 연구 50년 외길…“전통이 아닌 정통 정립에 노력”
‘우리옷’ 연구 50년 외길…“전통이 아닌 정통 정립에 노력”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6.04.26 1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부자 복식학자
50년간 한국 복식사를 연구해온 복식학자 고부자씨가 서울 종로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다.

복식학자 고부자씨(71)의 책상은 작은 천조각들을 이어 만든 고운 조각보와 가위, 바늘, 실들로 가득했다. 한켠엔 책들이 놓여있었다. 우리옷의 역사와 출토유물 등을 위해 50년 가까이 살아온 그의 작업실은 작은 박물관, 살아있는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제주어를 쓰며 “제주사람이 제주말을 써야한다”고 말했다.

“전통(傳統)이 아니라 정통(正統)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고부자씨가 웃으며 툭 던진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국 복식사를 연구해온지 어느덧 50년이 다 되어가는 고수(高手). 옷감에서, 바느질에서, 디자인에서 그는 많은 것을 연구하고 추론한다. 역사와 민속학에서 다시 옷의 역사로 분류되는 ‘복식사’라는 낯설었던 영역에서 큰 족적을 남긴 그다. 한국복식의 큰 거목인 고(故) 석주선 선생이 그의 스승이다.

“출토유물을 고증한다는 게 죽은 이들과 생을 함께했던 물건들을 살피는 작업이어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미라를 직접 보고 만져야 하지요. 그들이 입었던 옷을 빨고 복구해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고. 그러니 죽은 이들과 마주하면 대화도 해야하고….”

복식사를 연구해온 그는 현대과학과 과거 민중의 삶을 넘나들어야 하는 ‘고증작업’이 외롭고 힘든 시간과의 대화라고 설명한다. 그의 주름진 손 마디마디가 오롯이 이를 증명했다.

“요즘 패션쇼를 많이 하는데, 옛사람들에게도 유행이 있었습니다. 여성의 치마인 경우 왼쪽으로 여미느냐, 오른쪽으로 여미느냐, 지방마다 다르지요. 물론 그들의 유행에는 철학과 가치관이 기준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색당파에 따라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니까요.”

고부자씨가 지도한 졸업생들의 작품집

그나마 왕족과 귀족의 기록은 남아있지만 민중의 삶, 그것도 민중들이 입었던 옷의 흔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그러기에 당대의 계급과 계층, 직업, 지역, 노인과 아이, 여성과 남성, 시대적 사건 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그의 깐깐한 눈은 박물관의 잘못 전시된 유물이나 설명을 매섭게 찾아낸다. 지독하다는 학계의 평가도 많다. 그는 “박물관은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교육현장인데, 대충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제대로 해야지요”라며 잘라 말한다. 학문에서 타협이란 없어야 함을 느끼게 한다.

“요즘 제주에서 물질하는 여성들을 ‘해녀’라고 하지요. ‘잠녀’라는 말이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분명 제주에서는 잠녀(좀녀·좀녜)·잠수(좀수)라고 써왔지요. 일본에 물질하는 남자, ‘해남’이라는 말이 있는데, ‘해녀’는 일본식 용어일 뿐입니다.”

그녀가 탐라순력도를 꺼내 보이며 잠녀(潛女) 기록을 확인시켜 줬다. “이제 이 땅에서 제주에만 아래아(‧)가 남아있습니다. 제주어가 훈민정음에 가장 가까운 거지요. 유네스코에서도 소멸위기 언어로 지정했는데, 제주어를 제대로 쓰는 것 못지않게 정확한 표현을 쓰는 것 역시 제주 역사를 지켜내는 겁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갈옷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물을 들여 만든 것이 갈옷인데, 화학염색을 하는 게….” 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래서 그는 텔레비전의 사극을 잘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자꾸 옷에 눈이 가서, 재밌어야 하는데, 고증을 잘못해서 틀린 게 많아 오히려 드라마 보는게 힘들어서요.”

요즘 한복을 입고 경복궁과 서울 삼청동 주변을 거니는 젊은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물론, 우리 한복을 많이 입고 대중화시키는 것은 좋지만, 제대로 입어야지, 옷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말이 좋아 ‘퓨전’이지, 옷고름 하나, 섶 하나를 봐도 조상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는 한눈에 훤히 보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손을 거쳐간 것이 무엇이던가? 독립기념관의 유관순 동상의 무릎을 훤히 드러낸 짧은 치마를 보고 “3·1운동 전·후 여성들의 평상복 치마 길이는 발목이 조금 드러날 정도였고 버선목의 길이도 20~25㎝였다”며 “치마의 길이는 3·1만세운동 이후인 1920년대부터 식민지정책으로 짧아졌다”고 설명해준다. 2013년에는 경북대학교의 한 교수가 진품이라며 내놓은 세종 ‘익선관’의 진위 논란이 있었다. 세종대왕이 머리에 썼다는 익선관을 살핀 그는 모양과 사용된 옷감, 직조, 바느질, 문양 등을 살핀 뒤 ‘사실이 아니’라고 확언하자 학계에서 일대 논란이 일었고 이후 탄소연대 측정 결과 그의 말이 사실임이 입증되기도 했었다. 최근 다산 정약용의 초상도 바뀌었다. 수묵화가인 김호석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가 새로 그린 초상은 다산이 독서와 저술로 시력이 크게 나빠졌다는 기록과 어릴 적 천연두를 앓은 흔적으로 눈썹이 세갈래로 갈라져 삼미자(三眉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 등으로 안경쓴 다산의 새 초상이 나오게 된 것. 물론 고증은 그의 몫이었다. 경기도 양주시 김삿갓 고증작업에 참여하는 등 그의 바지런한 눈과 손을 거쳐간 출토 복식만 수천점에 달한다.

 
 
고부자씨의 아기버선 작품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계획보다는 작은 희망이 있다”며 “제주의 전통과 정통을 잇는 패션쇼를 한 번 해보고 싶다. 탐라순력도에 나와있는 여러 모습을 재현해보는 거, 제주다운 모습을 알려내는 거, 그게 진짜 제주다. 그 작업을 상상만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고 말한다.

고희를 넘긴 그가 매일매일 꿈꾸며 사는 에너지의 근원을 묻자 한마디로 답했다. “난 제주 년(女)이다, 밭에서 검질(잡초)매며 컸고 우주같은 어머니를 뒀기에 가능하다. 이제 죽어도 스승 석주선 선생에게 부끄럽지 않다.” 그의 목소리가 잠시 잠겼다.

 

▲고부자씨는…

고부자는 1944년 제주시 오라동에서 태어났다. 제주대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열아홉살에 제주를 떠나 교사생활을 하며 동덕여대, 국제대학에서 복식사와 인연을 맺은 뒤 이화여대와 단국대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출토유물 현장을 누벼온 그는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 민속학연구소장, ㈔제주학회 회장, 한국전통문화대학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우리옷 변천사를 정리한 ‘우리생활 1백년-옷(현암사)’(2002년) 등 다수의 도서와 논문이 널리 인용되고 있다.

서울=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