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에 생각하는 ‘지조’
단오에 생각하는 ‘지조’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1.06.13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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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4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 멩질’ 날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설, 추석과 함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였다.

제주사람들은 설은 아침이고, 단오는 점심, 추석은 저녁으로 생각해 매년 세 번의 ‘멩질’을 먹었다. 육지부에서는 그네뛰기, 씨름, 머리감기 등 단오 민속놀이 풍습이 많았으나 그런 건 없었고, 조상에 차례를 지내는 조촐한 명절이었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자는 다섯의 의미이므로 단오는 5월 초닷새라는 뜻이다. 이 날을 수릿날(戌衣日, 水瀨日), 중오절(重午節), 천중절(天中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하듯이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다. 

멩질 차례를 지내고 나서 할아버지 손 잡고 일가 친척들이 모이는 큰 집 대청에 가면 모여든 사람들과 한 낮에 내리쬐는 왕성한 태양의 열기가 뜨거웠다.

지금은 사라진 단오 멩질의 추억이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1819)는 조선 순조 때 김매순이 열양(한양)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책으로 단오의 유래에 대해 이런 설명을 붙였다.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 때 굴원(屈原)이라는 강직한 신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주장과 귀족들의 부패상을 폭로하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강남으로 유배됐다.

어느 날 강가에서 쉬고 있는 데 한 어부가 “세상 사람들이 다 명리(名利)에 취해 동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당신 혼자 동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어부는 굴원의 지조(志操)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력함을 이기지 못 한 굴원이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 자살하였는데 그 날이 5월 5일이었다.

그 뒤 해마다 굴원을 제사 지내는 풍속이 생겨 수릿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단오는 지조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는 날이었다. 고려 말기 지조를 잃지 않았던 해좌칠현(海左七賢)중 한 사람인 이담도 그랬다.

그는 유배 중 단오날에 쓴 오언고시(五言古詩)에서 “하동에 귀양 온 뒤로 이제 두 번 단오를 맞는다. (중략) 세상 맛은 창포같이 쓰도다”라고 했다. 지조를 지키는 삶은 창포와 같이 쓴 맛이라는 것이다.

고려대에 재직했던 고(故) 조지훈(趙芝薰) 교수는 4·19가 나기 한 달 전 ‘지조론’을 발표하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고귀한 투쟁이다….”

선생은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말하고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봐야 한다고 했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동지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없는 지도자들을 질타했다.

▲오늘 단오에, 다시 선생의 지조론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는 까닭은 자명하다. ‘삼겹살 불판 갈라’는 요구가 드셀 정도로 ‘내로남불’이 극으로 치닫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에서 지조론을 들먹인다는 것 자체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객담처럼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사회에는 유배지에 좌천되고도 “권력의 보복을 견디는 것도 검사 일의 일부”라며 “담담히 감당하겠다”는 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은 누가 봐도 명리만을 쫓는 듯 보이는 철새들이 판을 치더라도 앞날의 희망을 본다.

조지훈의 일갈은 지금도 유효하다. “구복(口腹)과 명리를 쫓는 자들은 말 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한 해 건강은 단오 무렵에 챙겨 먹는 음식에 달려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름 한철 나기가 어렵다는 얘긴데, 앞날의 희망을 보려면 무엇보다 밥 잘 챙겨먹고 건강을 챙겨야 하겠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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