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을을 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가을을 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5.11.2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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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시인 / 다층 편집주간

가을이라는 말에서는 뭔가 알싸한 내음이 난다. 자연이 색깔을 바꿔 입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형형색색의 패션이 거리를 누빈다. 적당히 드러내던 풍경은 적당히 가려지는 풍경으로 바뀌고,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고민하던 여름에 비해 눈이 한결 편안해진다. 반면에 산의 모습은 참으로 솔직해진다. 자신을 가리고 있던 나뭇잎을 떨구어내고 허점까지 다 드러내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겨울을 맞는다.

봄이 캐주얼 차림의 가벼운 모습이라면 여름은 성장(盛裝)을 한 단정한 모습이지만, 가을은 세미정장 차림의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가을이 되면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가. 남자들은 이맘때면 가을을 탄다는 말을 하곤 한다. 뭐 딱히 그럴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이면 이성과 논리로 무장했던 지난 계절을 벗어버리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훌쩍, 그렇다. 가을이란 단어와 참 잘 어울리는 단어가 ‘훌쩍’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사전에서는 ‘거침없이 가볍게 길을 떠나는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가을이라는 계절을 맞은 남자들의 상태를 잘 표현해 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로 떠나고 싶다는 것일까. 문득 나 자신에게 묻는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장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쩍 떠나고 싶단다. 그 동안 쳇바퀴 같은 일상의 빽빽한 그물에서 벗어나 조금은 느슨한 몸과 마음의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그렇게 일탈을 꿈꾸는 것은 낭만적인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 동안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 사오정(45세 정년), 삼팔선(38세를 넘기지 마라),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십장생(10대도 장차 백수가 되리라),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 등의 은어가 무성하리만치 무한 경쟁의 조직 속에서, 기계의 부품처럼 조립되어 한 발만 삐끗해도 생존 자체에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 우리나라 남자들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지고 정년도 갈수록 짧아지면서 나온 시대상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들인데, 이는 곧 우리나라 남자들의 위태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가을에 꿈을 꾼다.

어디 남자들뿐이랴. 사람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몸과 마음을 충전할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하지만 요즈음의 세태로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움을 느낀다. 경제가 어렵다, 취업이 안 된다, 진학이 어렵다고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면, ‘잘 먹고 트림하는 소리’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현재의 상황에서 한 발짝만 물러서서 긴 안목으로 현실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 언제까지나 내가 이런 상태는 아닐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 또한 필요하다.

지금 어려우니 나중도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태도는 자신을 더욱 현재의 상태에 머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여긴다면 조금은 넉넉해질 것이 아닌가 싶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에서 불행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런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살면서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일 다름이요, 나의 현재를 바탕으로 최선의 꿈을 꾸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나’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 확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가을 나는 가을을 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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