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이기와 아날로그 시대
문명의 이기와 아날로그 시대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3.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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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 칼럼니스트

꽤나 오래전이다.

당시 회사 초년병이던 시절 회사 부장 한 분은 거의 매일 은행에 다녀오곤 했다. 회사 1층에 ATM기기가 있음에도.

다른 사정이 있는 줄 알았지만, 후일 다른 선배에게 들은 이유는 ATM기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 현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가는 것이었다. 문명의 이기를 전혀 이해 못 하는 시대착오라고 생각하곤 했다.    

며칠 전이다.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 이 단체 이름으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통장을 개설하러 은행에 갔다.

행원이 사인하라고 형광펜으로 표시해주는 곳에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면 된다. 행원의 안내에 따라 서명을 하고 비밀번호를 결정하고 통장 개설이 끝났다.

인터넷뱅킹을 위한 온라인 등록을 할 차례다. 6자리의 번호 생성기를 받고 기업 아이디를 적어넣고 계좌이체 할 때마다 안전을 위한 계좌이체번호 등록. 다시 체크카드를 만들기 위해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집에 가서 공동인증서를 발급받고 거래를 진행하면 된다. 

사실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만 했는데 거의 40분 이상이 걸렸다. 무엇보다 그 많은 비밀번호와 아이디 등 여러 가지가 많다 보니 기억할 재주는 없고 바로 스마트폰에 메모를 해둔다.

옆 창구를 둘러본다.

나와 거의 같이 창구에 들어선 초로의 여인은 아직 고군분투 중이다. 누구에게 돈을 부쳐주고 누구 이름으로 입금해주고 등등을 요구했지만, 타인의 이름이다 보니 쉽게 할 수 없는 내용인 듯싶다.

결국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서 사용하기로 합의한 행원과 고객은 비밀번호 설정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행원이 영문, 숫자, 특수문자를 합해 10자리 이상을 비밀번호로 만들어야 한다는 순간, 그 아주머니는 ‘멘붕’의 상태에 도달한 느낌으로 답이 없다.

서너 번 이상 이야기를 반복하며 행원의 목소리 톤도 높아가고 아주머니는 그대로 말을 잇지 못 한다.

한참이 지난 후 아주머니의 ‘멘붕’ 이유가 밝혀졌다. 어떻게 평소 쓰지도 않는 영문, 숫자, 특수문자를 합해서 각 10자씩 30자의 비밀번호를 만들고 이를 외울 수 있느냐는 것이 하나였고 특수문자가 뭔지 알지도 못 하는데 그걸 10자나 만들라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비밀번호를 30자 이상 만들라는 것으로 이해한 오해가 풀리고 특수문자라는 게 물음표, 느낌표 등을 말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며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30자의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음 사람을 위해 창구를 빠르게 나오면서 옛적 부장님이 생각났다.

나도 그렇지만, 그 여자 분에게 문명의 이기는 어떤 소용이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이라고 설명은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4자리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6자리, 8자리, 10자리로 계속 늘고 숫자에서 영문 대문자·소문자, 특수문자 등으로 점점 복잡해지는 게 문명의 발전 방향인 셈이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생활 곳곳에서 모든 일이 빠르게 랜선으로 진행 중이다. 

현재도 활발한 은행, 증권 같은 분야는 물론 회의와 예술 등 예기치 않은 분야까지 그 영향의 파급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생활의 편리함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앞으로 진행될 사회의 변화는 문명의 이기 대신에 고립과 절망의 시대가 돼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건을 사거나 돈을 부치는 일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문명이란 무엇일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서 우울감이 앞선다. 여전히 아날로그에 기대고 싶은 마음에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배려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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