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정답은 마지막 자기 모습!
삶의 정답은 마지막 자기 모습!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11.26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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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윤 제주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곶자왈공유화재단 이사

삶은 정답이다!

거실에 걸려있는 가훈의 앞 문장이다. 2005년 여름, 사람과 본성에 대한 세미나에서 처음 들었다. 그 문장을 잊지 않으려고 가슴에 새겼다. 지금 나의 모습이 내가 사는 삶의 실재(實在)다. 나의 삶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나의 삶은 나의 모든 것을 그대로 투영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며 살고, 책임지며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삶은 정답’을 그렇게 생각했다. 

강연을 듣는 동안 오늘의 실재와 미래의 모습이 동시에 스치듯 지나간다. 그 순간, 나의 미래가 암울하게 보였다. 절망적 고독, 마음의 아픔과 육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바라는 미래의 삶과 실재 사이에 차이가 너무 컸다. 무엇이든지 찾아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가훈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앉아 있다. 거실 한 편에 15년째 걸려 있는 가훈이다. 한 자 한 자 뚫어져라 응시한다. 지난 세월의 잔영(殘影)이 글자 사이로 흐릿하게 지나간다. 

40대 중간 나이에 아내와 함께 가훈을 걸었다. 가장 바쁘게 살던 시절이었다. 직장을 핑계로 몸도 마음도 분주할 때였다.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을 뿐 불평 한마디 하지 못했다. 직장 은퇴 후에, 그리고 황혼까지 잘 살게 하는 투자라 믿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일 중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를 누리며 미래를 위한 준비니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미래를 현재의 연장으로만 단순하게 생각했다.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미래라고 기대했다. 기운이 떨어지는 만큼 쇠잔하게 될 미래를 연상하지 못했다. 현재를 위하는 삶만 살고 있었다.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 아니었다. 

직장(사회)에 대한 비중이 많았다. 얘기로는 가정을 위한다면서 실상은 밖을 향해 살았다. 자기 한 몸 처신하기에도 급급했다. 집에서 하는 일이나 역할은 가장 적었다. 가정에 대한 기여도에 비해 지나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가족의 중심이 마치 자기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다. 식구들의 자율을 제한하며 살았었다. 밖에서는 가정적이었으나 집에서는 가부장적이었다. 집안과 밖에서 행하는 삶의 실재가 많이 달랐다. 작은 자의 전형이었다. 소인배로 살고 있었으니 소인배로 끝날 인생이다. 삶이 정답이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삶은 정답!’ 가훈으로 삼기에 부담스러웠다. 그때 나의 수준은 그랬다. 그 글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었다. 작은 자의 특징은 생각이 많고 여러 갈래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가훈을 걸 때 나의 생각도 여러 갈래였다. 가슴에 새겼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룰 자신이 없었다. 부디 실천해 달라는 아내의 애원도 지나치듯 들으며 피하려 했다. 어둡잖은 생각들로 마음속이 가득 차 있었다. 자아만 키우며 살았었다.

자신의 부족을 가훈으로 감추려고 했다. 정리 안 된 여러 갈래의 생각을 덮으려고 했다. 나 자신을 위한 가훈이 아니었다. 가훈을 이용해 나의 실재보다 더 크게 보이려는 허상까지 함께 걸었다. 지금처럼 살면 내일도 지금처럼 살게 된다. 삶을 바꿔야 한다. 그것을 찾아 이뤄가는 게  인생이다. 나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자아로는 자기 실체를 알지 못한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지도 못한다. 자신만 자기를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다. 자기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기애에 빠져 자아만 키운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일도 오늘처럼 살며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 

예리하게 관찰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기를 지켜볼 때 가능하다. 문제와 허물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수치와 아픔을 수용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이 감당하는 고통의 크기가 소인과 대인, 성인을 정한다. 큰 사람의 눈으로 봐야 크기와 수준이 크게 달라진다. 전체를 봐야 한다. 부분에 집착하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자기와 환경, 현재와 미래, 영원까지 함께 통찰해야 한다. 

외적인 삶에 몰두하다 보면 그것에 붙들리게 된다. 일에 빠지면 일만 보이고 자신은 보지 못한다.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살게 된다. 삶의 의미까지 자기가 아닌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한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한다. 더 많이 얻으려고 더 바쁜 일상을 자초한다. 내면을 살피는 일이 점차 줄어들어 간다. 자기 자신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내면에 집착하면 주위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실상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 현실을 밀어내며 은둔자처럼 살아가려 한다. 모두 다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

어제의 삶이 오늘의 모습이다. 오늘의 삶은 다시 내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상이 모여 궁극(窮極)을 이룬다. 궁극을 제외하면 모든 일상이 과정이다. 과정에 머문 삶을 살면 안 된다. 일상은 궁극의 실재를 위해 필요한 시간들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마지막 자기 모습(궁극의 실재)에서 찾아야 한다. 삶의 정답은 오직 궁극의 실재를 이루는 것이다. 인생은 궁극의 실재를 이루려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삶의 정답은 자신이 살아온 궁극의 실재로 판가름난다. ‘모든 것을 다 이뤘다.’ 아니면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나의 삶도 어느 하나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반드시 궁극의 실재와 이어져야 한다. 과정에 붙들린 삶은 꿈꾸는 삶이다. 하루빨리 꿈에서 깨나야 한다. 궁극의 실재와 하나 되는 일상, 그것이 진짜 인생이다.

뉴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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