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했던 해녀 역사·삶 고스란히 간직한 길
강인했던 해녀 역사·삶 고스란히 간직한 길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8.0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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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도리 숨비소리길-1

해녀 유네스코 등재 후 2018년 개장
해녀박물관 시작 4.4㎞ 구간 2시간 소요
충혼탑 하도 출신 애국지사 흉상 이목
슬픈 사연 간직 호치마루 위령비 뭉클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부조물.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부조물.

숨비소리길은 20161130일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해녀문화를 알리기 위해 2년 동안 준비과정을 거친 끝에 2018121일에 개장했다. 해녀박물관을 시발점으로 하도리 지역에 분포한 해녀문화 거점을 한 바퀴 돌아오는 4.4구간인데 걸어서 2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출발점부터 별방진성까지는 올레 21코스와 대부분 겹친다.

■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올레 21코스를 취재하기 위해 다녀갔던 해녀박물관을 다시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옆 항일운동 기념탑으로 갔는데 오른쪽에 전에 없던 하도리 출신 세 분의 해녀(김옥련·부춘화·부덕량) 애국지사의 흉상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 분들은 19321월 구좌면에서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의 부당한 침탈 행위를 규탄하는 항일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일본인 도사(島司)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했고 민족 운동가들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2003년에 건국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기념탑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옆 강관순의 해녀가를 읽어보고 돌아서는데 서쪽에 문주란 무더기가 나도 보고 가라는 듯 곱게 피어 아는 체를 한다.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주변 세 해녀 애국지사 흉상.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주변 세 해녀 애국지사 흉상.

■ 삼신당을 돌아보고

전에 보았던 3척의 배와 불턱, 해신당을 다시 보고 구좌 하도 운동장 길로 들어섰다. 때마침 이 지역 해안에서 볼 수 있는 황근(黃槿)과 문주란이 피어 향토색을 드러낸다. 문주란이 자생하는 토끼섬이 보이는 곳에 황근이 자생하고 있는데 지역에 맞는 꽃을 잘 골라 심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길로 들어섰는데 퍼뜩 안내판이 눈에 띄어 가보니 삼신당이다. 이 곳 삼신당은 여씨할망당또는 금산당이라고도 한다. 오른쪽으로 꾸지뽕나무가 우거지고 시멘트로 포장된 골목길을 들어서니 바로 조그만 마당과 당집이 나왔다. 돌을 쌓아 시멘트를 바른 조그만 당집엔 플라스틱 슬레이트를 덮었다.

안에 제단을 마련해 놓고 그 위에 철문을 둔 상자를 두어 여씨할망 신위를 모시는데 작은 판자에 여씨할망 신위라 한글로 쓰고 갈래 머리를 붙여 놓았다고 했으나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 그냥 돌아섰다. 정월 12일에 대제, 212일에 영등굿, 712일에 백중맞이, 1012일에 시만국대제를 벌였으나 오래 전에 중단됐다고 쓰였다.

면수동 삼신당.
면수동 삼신당.

■ 변해가는 시골문화

면수동 마을 골목길과 집들은 옛 형태 그대로인데 양쪽 쉼터의 팽나무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보인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얼마 지나지 않은 곳, 창고 같은 건물에 한글로 된 외국어 이름이 걸리고 하얀 칠을 한 것으로 보아 그만하면 민박집 같아 보인다. 옛날 같으면 찾지도 못 할 이런 시골길에 생각지도 못 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어디든 이름만 대면 내비게이션이 다 데려다 주니 한적한 곳에 재미있게 꾸며 놓은 집들이 많다.

면수동 시골집.
면수동 시골집.

■ 호치마루의 위령비들

농로를 따라 동쪽으로 계속 걷다가 올레길과 숨비소리길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꾸라는 표지를 보고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왼쪽 조그만 공터 이곳저곳에서 내 사연을 들어보라는 듯 고만고만한 크기의 표석들이 잡초더미 속에 모여 손짓한다.

가까이에 있는 비를 들여다보니 김해김씨의 위령비다. 일본 고베(神戶)에서 별세해 이 곳에 안장했다는데 살아서 가까이 못 했던 아쉬움을 혼이나마 곁에 모시게 됨으로써 한을 풀게 된 후손들의 정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옆 김해김씨의 사연은 눈물겹다. 1923년 젊은 시절에 도일해 일본인과 혼인해 11녀를 두었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으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사촌동생 넷이서 모여 의논한 끝에 막내동생의 아들에게 생일날을 기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위령비를 세워 명복을 빈다는 내용이다.

세어보니 총 13기로 그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512일 여수 근해에서 피습돼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부인의 영혼을 불러 세운 망사비, 나란히 세운 경주김씨 형제는 일본에 갔는데 소식이 두절돼 돌아간 것으로 인정, 후손들이 모여 세운 위혼비고 여산송씨 형제는 6·25전쟁 때 출타 후 생사를 몰라 영혼을 불러 세운다는 위령비다. 부산에서 돌풍을 만나 사라진 동래정씨의 망사비, 하도리 면수동 출신의 아내를 얻었고 이 곳에 와 살고 싶었는데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 해 영혼이나마 이 곳에서 바다를 보며 지내게 하겠다는 김해김씨의 무덤도 끼었다. ‘호치마루는 비문 내용에서 찾은 지명이다.

호치마루 표석군.
호치마루 표석군.

■ 낯물밭들은 폐업 중

2년 전 7월 말 이 곳을 찾았을 때는 가뭄과 무더위로 당근 씨앗 파종이 늦어져 밭마다 꺼멓게 그냥 있더니 올 7월 말엔 장마 때문인지 밭은 갈아 파종한 흔적은 있는데 새싹은 보이지 않고 살아남은 잡초만 파래지기 시작한다.

길 안내도에는 낯물은 면수동의 옛 이름, 밭길은 면수동 마을 밭으로 난 길이라 썼다. 숨비소리길을 이 곳으로 낸 이유는 해녀들이 평상시에는 밭에서 보내고 물때가 되면 바다로 간다는 뜻일 터. 옛날 같으면 조나 콩 또는 고구마 등의 작물로 밭이 그득하고 검질 매는 사람들이 밭마다 들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밭은 검은 흙빛으로 그냥이고 두어 군데 밤호박 심은 밭이 보일 뿐이다.

별방진으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을 때 저 안쪽 밭에 무슨 작물인지 파랗게 보여 일부러 골목길로 들어가 보았더니 어주에(어저귀)라는 잡초만 그득하다. 그 중에는 눈에 익은 간잘귀(개똥참외)와 푸께(꽈리)도 섞었다. 아직 열매가 안 익어 섭섭했으나 그래도 반갑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낯물밭길.
낯물밭길.

 

뉴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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