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인문학’
‘걷기의 인문학’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0.05.3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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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걷기 천국이다.

제주시내 가까운 공원에만 가면 아침 저녁으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왜 걷느냐고 물어보면 우선 건강이고 걷기와 사유(思惟)의 관계를 짚어가기 시작하면 걷기의 인문학이 된다.

걷다보니 살만 빠지는 게 아니고, 삶의 기름기도 빠지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 간에는 포만감에 사로잡혀 살았는데, 윤택한 것이 좋은 줄만 알았는데... 걷다보니 그 것들은 별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걸어서 행복하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도민들 중 걷기를 실천하는 사람이 지난해보다 줄었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조사했더니 최근 1주일 동안 걷기를 한 번에 10분이상, 하루 30분 이상 걷기를 주 5일 이상 실천한 사람의 비율을 나타내는 걷기 실천율201835.4%에서 지난해 33.2%로 줄었다는 것이다.

필자도 어머님 노환으로 새벽 걷기를 한 동안 중단했다가 요즘 다시 시작했다.

신산공원에는 여전히 아침 6시에는 국민체조가 시작되고 나무들도 마루운동 체조선수들처럼 공원 마당에 두팔을 활짝 벌린다.

난닝구 할아버지는 건강하게 손바닥을 짝짝치며 뒷걸음 운동을 걷는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20도 정도 기울어진 비스듬한 자세로 걷던 피사의 사탑 할아버지는 며칠 째 보이질 않는다.

이젠 걷기가 힘들어졌을까.

미국의 인문학자인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걷기의 인문학’(김정아 옮김, 반비)에는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는 이런 대목이 있다.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 편이 된 상태다. 오랜 불화 끝에 대화를 시작한 세 사람처럼. 문득 화음을 들려주는 세 음표처럼. 걸을 때 우리는 육체와 세상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육체와 세상 속에 머물 수 있다.”

사람은 걸을 때 삶이 있고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원래 짐승들은 달리고, 새는 날고, 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걸었다.

그 중 인간은 걷지 않고 타게 됐다.

타는 것은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것이다. 걷는 것은 타는 것과 다르다.

걷는 것은 비움이다.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를 한 곳에 가두지 않음이다. 걷다보면 가진 것이 짐이 되고, 그 가진 짐은 이내 무거워진다.

자연 가진 것을 풀어 놓아야 한다. 이는 나눔도 되고 베풂도 되고 또 자유도 되는 것이다.

걷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걷다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소리가 들려 온다고. 필자는 아직까지 그 내면의 소리를 듣지는 못 했으나 이런 건 알게 됐다.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들, 그 덩어리들은 버릴수록 맑고 가벼워 진다.

프랑스 사회학자는 다비드 드 브르통은 느리게 걷는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잠정적으로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던진다. 더는 자신의 신분이나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파뭍히지 않는다.

사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기에는 걷기보다 더 좋은 게 없다.

걷는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삶을 다시 생각해 볼수 있다.

방구석에서 암만 끙끙대도 잘 해결되지 않던 고민도 걷다 보면 절로 풀리거나 해법이 떠오른다.

마음도 차분해지고 편안해진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생긴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이 공원을 가고 올레길을 찾아 떠나는 것일 게다.

오늘 아침 공원 길에서도 만난 민낯, 맨얼굴들은 참 밝고 맑았다.

버리는 것만 홀가분한 게 아니다. 벗는 것도 즐겁다.

위장의 갑옷을 벗는 즐거움은 걷는 사람만 안다.

또 다른 걷기의 인문학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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