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가 선포한 ‘책의 도시’
제주시가 선포한 ‘책의 도시’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0.05.2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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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은 공원이나 강가에서 독서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그 격조 높은 안정감과 평화로움. 우리가 거의 잃어버린 모습이지만, 20~30년 전만 해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필자의 세대가 대학에 다닐 때는 ‘폼생폼사’라고 어디를 가나 책 한두 권을 끼고 다녔다. 그만큼 우리의 ‘독서 강박증’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책을 펼치지는 못하더라도 독서는 해야 된다고 스스로를 강박하는 이율배반적인, 그러나 건강한 병리현상이었다. 내 혈관 속에 지식인을 독서인으로 불러온 문화적 전통이 아직도 흐르고 있는 까닭이었을까. 책을 읽는 유럽인들을 봤을 때 스스로 게으름을 탓하며 주눅이 들었다.

지난 주말(23일). 제주시는 ‘책의 도시 제주’를 선포했다. ‘책 읽는 도시’에 걸맞게 연중 독서와 관련한 행사를 하고 9월에는 신산공원에서 전국 최대 규모의 ‘책 축제’도 열린다.

▲갈수록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독서 환경도 변화하고 있다. 세계 제1의 IT 강국이라서인지 종이매체(책)가 점점 그 영향력이 떨어지고 점차 그 자리를 스마트기기가 차지하고 있다. 책보다 우선 스마트기기를 찾는 환경이 됐다.

지난 3월 발표한 문화체육관광부의 ‘2019 국민 독서실태조사’를 보면 지난 1년(2018년 10월 1일~2019년 9월 30일)간 우리나라 성인이 종이책 연간 독서율은 52.1%, 독서량은 6.1권으로 나타났다. 2017년보다 각각 7.8%포인트, 2.2권 감소했다. 2009년 독서율 71.7%와 비교했을 때 10년 사이 약 20%포인트 감소한 셈이다.

독서율은 지난 1년간 일반도서(교과서, 학습참고서, 수험서, 잡지, 만화 제외)를 한 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을 말한다. 독서율 52.1%란 국민 절반가량만이 1년에 책을 한 권 이상 읽었다는 의미다. 여기에 독서량 6.1권을 결합해보면 1년간 국민 절반이 책을 두 달에 한 권가량 읽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0~30년 전만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독서율은 세계 1~2위를 다투었다고 한다. 이제는 독서율이 OECD 가입국 중 가장 낮다. 종이 책은 우리 곁을 떠나 박물관의 박제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분명 그건 아니다. 군소리 같지만,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꿈꾸게 한다. 가슴을 훑는 시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소설이든, 곰팡내 나는 고담준론의 인문서든, 현기증과 졸음을 동시에 유발하는 과학서든, 족집게처럼 지침을 내려주는 실용서든, 책을 쓴 이가 빚어낸 활자의 연금술이 읽는 이의 영혼을 자유롭게 만든다. 인쇄매체만이 줄 수 있는 활자의 맛이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아우를 수 있는 것치고 책장에 침을 발라 가며 삭히고 익힌 꿈들을 딛지 않은 것이 없다. 사실 인터넷도 책을 빼면 쭉정이다. 책이 아니라 만화나 인터넷 소설에서 주로 길어올리고 있는 영상문화가 자꾸 가벼워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인터넷과 영상에 밀려 우리 사회는 ‘읽는 사회’에서 ‘보는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흐름에 책 사랑까지 휩쓸려 버린다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보는 사회는 읽는 사회의 토대 없이는 사상누각인 까닭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책을 느낀다. 아무리 편리하다 한들 디지털화한 이미지가 종이책을 직접 볼 때 느끼는 가슴 벅찬 흥분을 안겨줄 수 있을까? 이런 매력은 책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풍기는 종이냄새와 손끝에 닿는 감촉은 또 어떻게 버릴 건가. 잠자리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도 책은 아무 일 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인 책은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과학기술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 라디오, TV가 신문을 대신하지 못했듯이 인터넷과 영상이 종이 책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독서는 문화적 자본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회문화 전반의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책으로 키운 시민의식의 성장은 민주주의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제주시가 ‘책의 도시’를 선포한 뜻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신산공원에서 책 읽는 시민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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