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독재자 사이
영웅과 독재자 사이
  • 제주일보
  • 승인 2020.05.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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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흠 전 한국방송대 제주지역대학장·논설위원

2020년의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진영논리가 격화되면서 극단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얼핏 보면 이 갈등은 2019년에 있었던 일련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사건으로 인해 현상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다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의 기원이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과거의 독재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만하다. 당시에는 신화의 괴물처럼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면서 권력을 휘둘렀던 독재정권과 그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고 이 두 집단의 관계가 작금의 극단적 대립을 낳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병란 같은 재난으로 세상이 혼란에 빠져 일상의 삶을 지속하기 힘든 시기를 난세라고 한다. 이때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영웅을 찾는다. 여기에 부응하는 존재가 바로 고통을 주는 대상과 맞서 싸우며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적 요구와 필요에 의해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의 20세기는 그야말로 난세였다. 엄혹한 일제강점기를 지나자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겪었고 곧바로 장기독재와 군부독재의 시기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이 나타났고 6·25전쟁에는 조국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이 속속 출현했다. 장기독재와 군부독재의 시기에는 민주화 투쟁이 조직화하면서 운동권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웅으로 자리했다. 이러한 영웅들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므로 난세에는 필요한 존재였다.

난세의 영웅은 사람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상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그것이 해결되면 사라지는데, 이점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우상과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난세의 영웅은 투쟁의 정신과 기술로 무장하고 적으로 규정한 상대를 물리치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투쟁 이외의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영웅정신은 난세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그것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거나 사라져야 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난세에는 싸움을 잘하는 영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평화의 시대는 그에 걸맞는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평화의 시대가 오면 난세의 영웅은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떠나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세의 영웅이 평화의 시대에 권력의 자리에 올라 지도자로 군림하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 혹은 투쟁의 시대가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난세의 영웅은 그때까지 살아왔던 투쟁방식이 고착화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자신을 반대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 그것을 없애려는 싸움으로 일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회적 갈등을 극대화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영웅 중에는 대장군 한신이 있었다. 천하가 안정된 후 함께 떠나자는 장량의 권고를 무시하고 제후의 자리에 올랐던 그는 곧 반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난세의 영웅은 평화의 시대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의 존재가 영원한 영웅으로 남기 위해서는 고정된 어느 한 방식에 매몰되지 않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변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계적 투쟁방식만 고집하지 않으면서 수용과 협치를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영웅이 출현하기를 기대해본다.

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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