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근진을 아십니까?
엄근진을 아십니까?
  • 제주일보
  • 승인 2020.05.19 2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애 제주아동문학협회장·동화 작가

여학생 서너 명이 내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영어쌤이 약간은 엄근진 아냐?”

주고받는 대화가 들려온다. 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들려오는 데야 어쩌랴. 그런데 듣고 보니 참 요상하다. 아마도 영어 선생님 이름인 것 같은데 엄근진이면 엄근진이지 약간은 엄근진이라니. 이 무슨 고약한 말버릇이냐. 속으로 못마땅해 하면서 걷고 있는데 들려오는 대답 또한 아리송하다.

처음만 그렇지 친해지면 괜찮다네.”

아하. 나는 그제야 엄근진이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도 신조어나 줄임말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그러려니 했다.

여학생들의 화제는 돌고 돌다가 시험으로 바뀌자 어떻게 쉬지 않고 공부만 하라는 건지 모른다고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한 아이가 불쑥 스라밸하고 외쳤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입을 모아 응원구호라도 외치듯 소리쳤다. 스라밸! 스라밸! 스라밸.

그들의 말이 참 낯설다. 내가 마치 과거 조선시대를 살다가 시공을 초월해 현재로 이동한 사람 같다. 한 나라 안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워라밸 쯤은 알겠는데 스라밸은 또 뭔지.

집에 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스라밸이란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영어의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에 일 대신 공부를 집어넣은 신조어란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엄근진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남들은 다 아는 걸 나만 몰랐을까? 젊은 아이들과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이 글을 쓰면서도 조심스럽다. 아직까지 그런 것도 몰랐냐고 핀잔을 들을까봐.

언어는 시대에 따라 소멸하기도 하고 생성이 되기도 하니 신조어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신조어는 새로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하고 창의적인 부분도 분명히 있다. 또 문자로 소통을 할 때 줄임말의 필요성도 인정한다. 카톡으로 대화할 때 고지식하게 쓰다보면 상대방이랑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서 난감할 때도 종종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축약의 필요성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말의 참뜻과 형태를 파괴하면서까지 과도하게 축약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검색을 하다가 괄도네넴띤 완면하고 음쓰 버리러 갔다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햐아감탄사도 아니고 한숨도 아닌 기묘한 소리가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번역(?)을 하자면 팔도비빔면 한 그릇 깨끗이 다 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는 뜻이다. 괄도네넴띤은 팔도비빔면을 뜻한다는데 글자의 형태, 즉 획을 변형시킨 경우라고 한다. 이렇게 본래의 단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계속 변형을 시킨다면 우리말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언어 환경이 이렇듯 점점 나빠져 가고 있는 데는 방송도 한 몫 하고 있다고 본다. 국적불명의 줄임말이나 신조어를 자막으로 쓰는데 맞춤법을 아예 무시하고 쓰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런 현상은 특히 예능 프로그램이 심하다. 아무리 재미를 추구한다 해도 영향력이 큰 방송에서 아름다운 우리 말과 글을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나 싶다. 올바른 언어 사용을 선도해야 할 방송이 요즘은 언어의 파괴를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인터넷 신조어와 줄임말을 한참 읽어보다가 한숨이 나서 혼자 중얼거렸다.

얘들아, 적당히 하자. 아무리 세대차가 있더라도 우리나라 말이니 나이에 상관없이 알아들을 수는 있어야하지 않겠니?

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