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천 기념길' 조성과 의병항쟁사 재조명
'고승천 기념길' 조성과 의병항쟁사 재조명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4.1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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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도심에 항일운동 의병장 고승천(고사훈)을 기념하는 길이 조성된다. 제주시 제주제일중~연북로 승천로 약 1㎞ 구간이다.

의병이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스스로 조직된 민군(民軍)을 말한다. 1909년의 제주 의병은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발생한 소위 3차 의병 시기에 일어났다. 1909년 당시의 의병 전투는 전국적으로 1738회나 발생했는데 제주에서는 고사훈(高仕訓, 다른 이름 承天)·김만석(金萬石)등의 창의(倡義)로 발생했다. 이들은 제주 성 밖 광양에서 무기를 제작했다. 1909년 2월 25일 ‘왜적을 격퇴하고 국권회복을 달성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제주 전역에 발송했다. 그러나 1909년 3월 3일 관덕정에서 거사를 앞두고 의병을 규합하던 고사훈·김만석이 3월 1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3월 4일에 총살당한다. 당시 신좌면 대흘리 부우기(夫祐基)와 구우면 두모리 김재형(金栽瀅) 등이 격문을 접하고 의병 수백명을 모으고 거병을 준비했다.

현재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에는 제주의병항쟁을 기념하는 의병항쟁기념탑이 건립됐고 김만석이 일본 경찰에 의해 총살당해 시신이 방치됐던 대정읍 안성리에는 그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는 의병장 고승천을 기념하는 길을 조성하는 것을 계기로 제주의병항쟁사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면 한다. 한말 의병운동은 한국독립운동사상 민족자위 항쟁으로서 정치와 외교를 통한 비폭력 운동이 아니라 무력으로 투쟁한 폭력 운동이었다. 그것도 의열사(義烈士)들이 택한 개별적인 항쟁이 아니라 수백, 수천, 수만이 참가한 민족적 항쟁으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며 희생이 많이 따른 항일무장투쟁이었다. 한말 의병항쟁은 주권국가가 일제의 식민지로 넘어가는 전후 시기에 국권을 수호하고 회복하기 위해 투쟁했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의병항쟁은 1894년 갑오년부터 일어나 의병항쟁이 독립전쟁으로 전환하는 1914~35년 약 20년간 치열한 대일 투쟁을 벌인다. 따라서 한말 의병의 항일의식과 그 활동은 한국민족주의 성장의 기본 원칙을 제시해 이후 독립군과 광복군의 대일 민족운동에 있어서 그 원동력이 됐다. 그러므로 제주에서 일어난 한말 의병항쟁에 대한 전모를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일이야말로 제주역사 복원을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제주 의병들은 “우리 눈앞에는 왜적의 무리가 강산을 짓밟고 있는데 이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으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어섰다.
‘고승천(고사훈) 기념길’ 조성과 함께 제주의병 항쟁사의 재조명을 촉구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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