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무슨 죄 있으랴
꽃이 무슨 죄 있으랴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0.04.0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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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어머니는…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아들아,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앞의 것은 안도현의 시 ‘꽃’이고 뒤는 김형영의 시 ‘따뜻한 봄날’인 데 자식과 함께 꽃구경을 갔다가 버려지는 늙은 어미의 서글픈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또 이런 시도 있다.
“그대 고향에서 왔으니/ 마땅히 고향소식 잘 알겠군요/ 떠나던 날 우리 집 창문 앞/ 매화 꽃망울 아직 안 피었던가요(君自故鄕來 應知故鄕事 來日綺窓前 寒梅着花未).”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왕유(王維)의 ‘고향집 매화’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제주시 전농로에도 연분홍 벚꽃이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꽃은 언제 봐도 새롭다. 세상 소식은 들쭉날쭉해도 꽃소식은 일정하다. 서귀포시 고향 마을의 벚꽃도 어김없이 피었을 것이다. 휘날리는 벚꽃잎을 까만 교모(校帽)에 하얗게 받아 들고 까르르 웃는 소년들은 지금 거기에 있을까. 봄마다 터지는 이 꽃비에 마음이 붉어지고 온몸에 꽃물이 드는 것은 우리들의 이런 중학교 1학년 새 봄의 추억 때문이리라.

▲제주의 꽃은 벚꽃과 함께 유채꽃이다. 제주의 대표적 이미지는 벚꽃에 이어서 노란 꽃이 만발하는 유채꽃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봄빛에 노란 물결로 흐드러지게 피는 유채꽃들이 올해엔 다 피어보지도 못 한채 갈아엎어진다고 한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마을회는 마을의 자랑인 유채꽃 축제를 취소한데 이어 녹산로 유채꽃밭을 파쇄키로 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가운데 제주여행을 온 코로나 확진자 모녀가 표선면 소재 호텔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진 탓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힌 서귀포시 녹산로 유채꽃밭이 올해엔 이렇게 강제로 사라지게 됐다.
꽃이 무슨 죄 있으랴.
머지않아 이 노란 물결을 중장비로 갈아엎는 처참한 사진이 신문에 실릴 것이다. 봄은 화창해서 더 슬프다고 누가 말했나. 코로나19 사태로 꽃 축제들이 모두 사라지더니 피는 꽃 마저 파쇄하는 봄이다.

▲봄은 희망을 상징하지만 역설적으로 슬픔을 자아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그런 봄날이다. 듣거나 부를 때 까닭 없이 눈물이 나는 것도 꽃이 피고 지는 까닭일 것이다.
4·15총선이 열흘 남았다.
알 수 없는 공약이 난무하지만 꽃구경을 마음껏 하게 해 주겠다는 후보에게 한 표 찍어주겠다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답답해서 하는 얘기지만 심호흡 마음껏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산책할 수 있는 봄을 되돌려 준다면 한 표 던져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절대 봄에 꽃구경 가질 말라고만 할 일은 아니다.
누가 아는가. 이파리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민 꽃잎을 보노라면 삶에 지쳐 잃었던 용기가 불쑥불쑥 솟아날지.
지난 주말엔 하늘이 참 맑았다. 청명을 맞아 아버지 산소엘 갔더니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 꽃잎과 꽃잎 사이로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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