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교육 적극 장려했던 목사 금호의 유고
제주 교육 적극 장려했던 목사 금호의 유고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3.1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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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유고(錦湖遺稿)’(1907)

제주목사 지낸 금호 임형수 시문집
1907년 후손이 구판 보충한 중간본
금호유고(錦湖遺稿) 표지 본집(오른쪽)과 부록.
금호유고(錦湖遺稿) 표지 본집(오른쪽)과 부록.

제주로 책방을 이전할 때 속으로 은근히 기대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전통적으로 교육 열이 높은 곳이고 외딴 섬이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서나 문서들이 상당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아쉽게도 기대치보다 훨씬 수량이 적었고 그나마도 사방이 바다인 탓인지 습기를 먹어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게 많았다. 그래도 드물지만 때때로 좋은 자료를 만날 수 있어 소소한 기쁨을 느끼곤 한다.

얼마 전 도내에서 입수된 책도 그런 경우이다. 그 책 역시 간행 연도에 비해 상태는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우리 제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의 문집이었다. 바로 154511월부터 154610월까지 제주목사를 지낸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14~1547)금호유고(錦湖遺稿)’이다.

1677년에 쓴 이민서(李敏敍)의 서문에 따르면 저자의 외손인 유평(柳玶)이 흩어진 시문을 1차로 수습해 집 안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그의 종손인 유응수(柳應壽)가 김수항(金壽恒)에게 교정을 받아서 간행한 것이다. 우리 책방에 입수된 것은 아쉽게도 이 초판본이 아니라 1907년에 저자의 후손이 광주교당(光州校堂)에 보관돼 있던 구판(舊板)을 집으로 옮겨와 잔결(殘缺)된 부분을 보충해 중간(重刊)한 중간본이다(奇宇萬重刊序).

금호유고(錦湖遺稿) 본집(오른쪽)과 부록 속 표지.
금호유고(錦湖遺稿) 본집(오른쪽)과 부록 속 표지.

이 책은 본집과 부록 등 전 2책으로 구성됐다. 본집은 저자가 지은 시()와 책문(冊文), (), 잡저(雜著)가 수록돼 있다.

부록에는 동각잡기(東閣雜記)’ 등에 수록된 저자에 대한 기록을 편집한 제가잡기(諸家雜記)’, 중국 사신 등 제현(諸賢)의 수창시(酬唱詩)를 모은 제현수창’, 빠진 부분을 보충한 습유(拾遺),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의 발문, 조정에서 총명한 문신들을 선발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여가를 주는 제도인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 교유했던 인물들을 수록한 호당수계록(湖堂修禊錄)’ 등 저자 관련 부분과 저자의 조카 회()의 시문집인 관해유고(觀海遺稿)’, 이민서가 쓴 관해유고 발문이 첨부돼 있다.

금호유고(錦湖遺稿) 제주 관련 시(탐라관).
금호유고(錦湖遺稿) 제주 관련 시(탐라관).

당대의 권세가인 윤원로(尹元老)를 빗대어 만약 한 두 사람만 곤장 친다면 곧 진정시킬 수 있다’(若杖其一二人 則此可鎭定矣)는 말을 했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됐고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사건으로 사사(賜死)된 그는 조선시대의 정사(正史)인 실록에서 젊기는 하나 공부를 많이 한데다 재주와 사려가 호방하고 처사가 관대하여 호걸이라 할 만하다는 평가(명종 즉위년 1013)를 받았고 함께 사가독서했던 퇴계 이황이 참으로 재주가 기이한 사람이었는데 죄 없이 죽었으니 정말 원통하다”(‘逐睡篇燃藜室記述 卷十)며 애석해 했던 인물이다.

젊어서 과거에 올랐고 문장을 잘하며 활도 잘 쏘았으며’, ‘풍채가 좋고 기개가 매우 높아서 모두들 큰 인재라 했다’(동각잡기)는 그는 제주목사 출신의 유학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인 영혜사(永惠祠)에도 배향됐던 제주 교육을 적극 장려한 목사였다.

사약을 받고도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君亦可飮一杯不)’라고 했다(명종실록 2921)는 그의 기개와 목사 재임 시절 지은 제주 관련 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2011년 충북대 출판부에서 출판된 역주 금호유고’(역자 임동철 외 1)를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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