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자취 따라 걷다보면 만나는 우리네 역사
면암 자취 따라 걷다보면 만나는 우리네 역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2.1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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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라동 면암유배길-2

방선문에 새겨진 면암·귤암 이름 눈길
4·3 사건 아픔 간직 ‘어우늘’·‘민오름’  
500여 년된 팽나무 옆 좁은 길 지나면
정수암·두 신 모시는 정실 본향당 눈 앞
민오름 둘레길.
민오름 둘레길.

■ 조설대를 나오면서

최익현과 이기온의 이름을 새긴 바위(방선문).
최익현과 이기온의 이름을 새긴 바위(방선문).

조설대의 시설물이라든지 내용이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들었는데 문득 지난해 조설대 집의계 12인 경모식 때의 해프닝을 생각하며 전에 어느 학자가 지적했던 ‘경모비’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광무 9년(1905) 3월이라면 을사보호조약(11월)과 경술치욕(1910) 이전인데도 ‘의거문’에 그 단어가 언급된 걸로 보아 ‘신뢰가 안 간다’는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어떤 분은 문연사와 관련 “면암과 이기온의 교류에 대해 근거가 희박한데도 유명인사에 너무 기대려는 게 아니냐?”라고 평한다. 하지만 당시를 회고해 보면 어떤 입장이었는지 이해는 간다.

귤암 이기온은 어렸을 때 전라도 장성으로 건너가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온 후에는 주변에 크게 배울 만한 스승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차 대선비 면암의 내도는 바로 멘토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면암은 엄연히 유배 신분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간간히 뵐 수 있었을 테고 그게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가 돌아간 뒤 직접 한라산과 방선문에 나란히 이름까지 새겼다.

 

‘잃어버린 마을(어우늘)’ 표지석.
‘잃어버린 마을(어우늘)’ 표지석.

■ 조설대에서 민오름까지

조설대를 나와 남쪽으로 걷다보니 대나무가 보이고 ‘잃어버린 마을(어우늘)’ 표지석이 나온다. 어우늘은 400년 전에 형성된 농촌마을이었는데 무자년 겨울에 전소돼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입구에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고 나머지는 비어 있다. 이어 바로 연북로. 횡단보도가 없어 서쪽으로 한참 걸어가 민오름 앞 네거리에서 길을 건넜다.

유배길은 오른쪽 영실길로 가지 않고 왼쪽 민오름길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아무래도 운치 있는 숲길을 걷도록 배려한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면암이 이 길을 걸었다고 볼 순 없다. ‘유한라산기’에는 남문을 출발해 10리쯤 걸어 바로 방선문에 도착한 걸로 됐다. 오라마을에서 방선문이 10리 정도인 걸 보면 오라동에서 출발한 건 아니었을까.

지금이야 교통도 좋고 한라산 등산길도 잘 나 있지만 당시엔 길도 시원치 않고 한라산에 오를 일도 없던 시기다. 오라동에서 길라잡이 이기남 선비를 물색했고 같이 갈 10여 인과 5~6명의 짐꾼까지 대동하자면 비용은 이기온이 마련했을 터. 그런데 오라동에서는 바로 방선문으로 이어지는 한천을 따라 가야 쉽다. 하지만 면암유배길을 내려고 할 땐 이미 오라올레길이 먼저 나 있었다.

 

■ 민오름에서 정실마을까지

민오름 입구에서 동쪽으로 도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이다. 둘레길에 들어섰을 때 눈에 띈 안내판은 ‘면암과 오현’. 면암은 송시열 등 먼저 유배 왔던 분들이 머물렀던 곳을 돌아봤고 유배가 풀릴 무렵엔 귤림서원에 배향했던 제주오현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는 내용이다. 오름에는 소나무가 울창한데 그 엄한 재선충병에도 잘도 살아남았다. 사이사이 천선과나무, 예덕나무 같은 낙엽수, 햇볕 잘 드는 곳엔 까마귀쪽나무, 후박나무 같은 상록수가 자리를 잡았다.

오름 자락에 4․3길 안내판이 있어 올라가 보니 ‘민오름과 열안지’ 소개글이다. ‘민오름은 연미마을과 정실마을 사이에 위치한 표고 251m인 말발굽형 화구를 품은 오름이다’로 시작해,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당해 끌려 온 곳인데, 두 여인 중 1명은 가까스로 탈출했고 나머지 한 여인은 끝내 희생을 당했다는 아픈 사연을 적었다.

오름 동녘은 시야가 좀 틔어 나무 틈으로 사라봉과 별도봉 그리고 원당봉까지 보인다. 가까이로 과수원, 멀리 들판 너머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입춘이 지난 오름 남동쪽 너른 밭엔 보리가 제법 푸르다. 위아래로 큰 길이 뚫려서인지 정실마을에도 높은 건물이 많이도 들어섰다.

정실마을 팽나무.
정실마을 팽나무.

오랜 역사를 가진 정실마을

정실3길로 토천이라는 조그만 시내를 따라 들어가니, 바로 정실마을을 관통하는 아연로(1136번)다. 그곳에 조그만 면암유배길 간판이 있었는데 4.5㎞를 걸었고, 1.5㎞가 남았다고 썼다. 횡단보도를 건너 냇가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는데, 여기저기 새로 뽑은 다리가 많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이란 커다란 건물을 지나 혜조암 입구를 거쳤는데, 고목 팽나무가 섰다. 500여 년 된 보호수인데 마을을 지키느라 힘이 들었는지 등이 굽고 시멘트로 때운 흔적이 역력하다.

정자 옆에는 ‘면암과 편지 그리고 한라산’이라는 안내판을 세웠다. 면암은 유배시절 가족들에게 편지를 자주 썼는데, 내용은 대부분 집안 걱정이었고 그 속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 어쩌지 못 하는 가장으로서의 안타까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목사의 도움과 제주 사람들과의 교류 이야기가 들어있어 당시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정실 본향당.
정실 본향당.

■ 정수암과 정실 본향당

다시 커다란 팽나무 옆을 지나자 오른쪽으로 조그만 샘과 정실 본향당으로 가는 좁은 통로가 있다. 이 샘은 ‘정수암’이라고 하며 선조 20년 목사가 ‘영구춘화’를 보려고 이곳을 지나다가 물이 좋아 ‘옥련천’이라 했다는데, 그래서 면암유배길을 이곳까지 당긴 것 같다.

정실 본향당은 정실의 옛 이름이 ‘도노미’여서 ‘도노미 본향당’이라고도 부르며 할망․하르방 두 신을 모시는데, 할망은 ‘조숫물 삼대바지 삼신불법 할마님또’라는 산육신(産育神)이고 하르방은 ‘김씨영감 산신대왕 통정대부’다. 당에 갈 때는 메 두 그릇과 백지 10장, 실 한 타래, 돌레떡, 과일 2종을 차리고 가며, 제일은 정월 3, 7일이다. 아직까지도 관리를 잘 해 깨끗하게 청소가 됐고 제단은 조화(造花)로 장식했는데 근래 단골이 다녀갔는지 밀감 2개와 소주, 향로와 향 등이 놓여 있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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