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날 아침에 만난 이상한 풍경들
새해 첫 날 아침에 만난 이상한 풍경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1.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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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시인·성산읍노인회장

해마다 새해 첫 날 아침이면 성산읍지역의 뜻있는 분들은 관내 충혼묘지 참배 길에 오른다. 올해 11일 아침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 참배 길에 오른 우리 일행 앞에 올해는 참으로 이상한 풍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충혼묘지 진입 로터리에서 한 무리 시위 집단이 열심히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붉은 글씨의 깃발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들은 이 지역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새해 아침 참배 길에 오른 우리들과 또 그 길을 오가는 지역민을 향해 2공항 반대구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산읍주민들이여! 2공항반대운동에 동참하라는 의미의 행위다.

새해 벽두부터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볼멘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참배를 마치고 나올 때면 이 늙은이도 쓴소리 한 마디쯤은 해줘야지하고 벼르고 있었건만 그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치 풍각쟁이들을 만난 듯한 기분을 안고 신년하례 길에 올랐다.

지나는 길인 온평리와 신산리 마을 일주도로변과 수산1리 마을 안길에도 예외 없이 그 같은 깃발들은 펄럭이고 있었다.

물론 이곳은 공항 예정 부지와 관련된 지역이라 오래 전부터 그 깃발들이 꽂혀 있었지만 이날 아침의 느낌은 예전 같지만 않았다.

새해 벽두부터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곳은 성산지역만이 아니다. 제주도청 앞길 양쪽에 들어선 낡은 천막과 온갖 구호가 적힌 현수막, 울긋불긋한 깃발들, 이것이 바로 새해 아침 필자가 맞이한 제주도의 풍경이다.

이 같은 새해 아침의 풍경은 제주뿐만이 아니다. 돌아와 마주한 텔레비전 화면은 어떤가. 이 역시 펄럭이는 건 깃발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펼쳐지는 진보와 보수 단체가 보여준 집단행동의 모습, 한 쪽은 검찰개혁, 조국 수호등을 외치는 집단이고 한 쪽은 문재인 탄핵, 조국 구속, 추미애 사퇴등을 주장하는 외침이다.

대한민국 천지가 깃발 든 세상이 되고만 느낌이다. 어쩌면 깃발을 들지 않은 국민들만 모자라고 미련한 국민인 것처럼 보이는 새해 아침이다.

그렇다면 깃발이 갖는 본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깃발은 원래 어떠한 상징이나 글씨를 그려놓고 깃대 등에 게양해 특정 인물이나 단체, 혹은 국가 등의 권위나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돼왔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대한민국을 나타내기 위한 태극기가 그러하다.

이러한 상징성은 점차 다양하게 변화 돼서 경축의 의미’, 심지어 열차의 정지 신호대용으로도 이용되더니 급기야 깃발시위혹은 혁명의 상징물로 둔갑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서 그 깃발에 빨간색을 입히면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살벌함까지 가져온다. 왜냐하면 빨간색 의미 또한 분노, 증오, 혁명, 전쟁과 같은 의미와 함께 젊음, 사랑, 욕망, 애국심 같은 폭발적 생명력마저 갖고 있기 때문이다.

70여 년 전 일이 떠오른다. 필자의 나이 여덟 살 때다. 그해 우리 마을 공회당 마당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빨간 깃발이 휘날렸다. 그 깃발은 공회당과 마주한 우리집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한 무리 젊은이들이 공회당 마당을 메우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기억에 남는 건 이것뿐이 아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간의 날과 달이 지난 그해 가을이다. 적지 않은 마을 젊은이가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그 와중에 필자의 아버지를 비롯한 3형제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아버지 사촌과 고종·이종사촌까지도 끌려가 죽임을 당했던 일이다.

2020년 새해 아침, 저 길가에 나서서 흔들어대는 깃발과 TV 화면에 비치는 수많은 군중의 깃발 속 외침을 보면서 불현듯 그때 그 숭시나던 1948년도 제주섬의 섬뜩한 기억이 오버랩된다. 오늘의 이 느낌이 제발 그때의 사변 같은 징후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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