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간직한 길…조선 의병장 최익현을 만나다
역사 간직한 길…조선 의병장 최익현을 만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1.2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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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라동 면암유배길-1

정부 지원 콘텐츠 선정 2012년 개장
연미마을회관~방선문 잇는 유배길
집의계 12인 ‘항일’ 상징 조설대 지나
면암·귤암 유덕 추모 제단 ‘문연사’ 눈길
동산에 세운 조설대 비들.
동산에 세운 조설대 비들.

■ 오라동 일대에 개설된 면암유배길

면암 최익현이 제주에 유배 와서 머물렀던 곳은 제주시 일도1동 당시 윤규환(尹奎煥) 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라동 일대를 그의 유배길로 만든 데에는 아무래도 그와 연관되었다는 문연사(文淵社)와 그가 한라산에 가면서 거쳤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선문(訪仙門)까지의 길을 연결하기 위함일 것이다.

제주유배길2010년 지식경제부가 지원하는 광역경제권 연계협력 사업에 제주대학교 양진건 교수팀이 제안한 제주 유배문화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사업단에서 내놓은 사업이 그 대상에 선정돼 열어놓은 길이다. 내용은 제주유배길에서 나를 찾다라는 주제로 옛 제주성을 중심으로 제주성안길’, 오라동의 면암유배길’, 그리고 대정읍의 추사유배길 3개 코스이다.

면암유배길은 2012512일 제주웰컴센터에서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대학교 주최, 제주관광공사 주관으로 개장식을 열고 성대하게 길을 열었다. 코스는 연미마을회관에서 방선문까지 5.5, 2시간 거리다.

코스 출발지점인 오라동 연미마을회관 전경.
코스 출발지점인 오라동 연미마을회관 전경.

■ 연미마을회관에서 조설대까지

연미마을회관 앞에는 제주유배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코스를 그려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맞은 편에는 제주 오라동 43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코스 중 해산이 동네 가는 길은 면암유배길과 상당 부분 겹친다. 이곳 연미마을은 속칭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194851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뒤이어 발생한 53일 귀순공작, 55일 수뇌부 회담, 56일 연대장 교체, 515일 단독선거 등 43의 변곡점에 놓여 있다.

마을회관 앞의 조그만 표시판에 따라 동쪽으로 얼마 안 가 조그만 골목길(연사7)로 접어드는 곳에 조설대(300m) 안내 표지판이 있다. 이어서 미군의 43영상기록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에 나오는 불탄 옛집터가 나타난다. 당시 불타버린 여섯 집을 알리는 사진과 설명 안내판이 사실을 증언하듯 서있다. 그러나 영정사진처럼 검은 테를 두른 초가집들은 아무 말이 없다.

조설대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고, 철문 왼쪽에 오라동 망배단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세웠다. 향토유형유산 제11호인 망배단은 왕의 등극과 붕어(崩御), 왕세자 탄생 등의 일이 있을 때, 멀리 떨러져 있는 유림들이 그 연고가 있는 쪽을 향하여 절하는 단이다.

집의계 광복 경모비.
집의계 광복 경모비.

■ 조설대의 집의계 광복 경모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集義契光復敬慕碑(집의계 광복 경모비)’가 눈길을 끈다. 뒷면에 선서문(宣誓文)을 새겼는데 吾等半萬年 歷史負戴…로 시작하고 있다.

그 내용을 풀어보면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걸머진 이 땅의 백성이다. 우리는 확고부동한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며 수구개화 등 당파의 부질없는 분쟁은 물론 나라의 정치를 그르치는 간상모리배와 왜구의 침입을 단호히 반대하여 의거로서 항거할 것을 맹서한다. 우리는 이 같은 우국충정과 예의도덕을 만천하에 밝혀 모든 백성이 감동되도록 행동할 것이며 왜놈을 한칼에 살육할 것을 모든 계원과 더불어 선언한다. 광무(光武) 93이다.

그 뒤에 12계원의 이름과 그 내용을 밝혔는데, 당시 집의계 대표는 이응호(李膺鎬)였다. 단기4320(1987) 광복절에 김순택이 세운 이 비의 글씨는 소암 선생이 썼으며, 당시 문연사 사장은 김순생, 조설대 주간은 이종억이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것 말고는 오늘날의 현실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설대 입구 안내판.
조설대 입구 안내판.

■ 문연사와 조설대

안으로 들어가니 소나무 아래 비석이 앞뒤로 나란히 섰다. 앞이 집의계 애국선구자’ 12인의 이름을 새긴 비이고, 뒤가 조설대표석이다. 아래쪽에는 자연석에 새긴 글씨를 보호하고자 액자처럼 돌로 둘렀다. 안내판에 따르면 조설대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을 때 12인의 소장파 유림들이 집의계를 결성한 후 이곳에 모여 광복투쟁을 결의하며 새긴 글로 조선(朝鮮)의 수치를 설욕(雪辱)하겠다는 뜻이라 한다.

당시 집의계 회원은 진옹 이응호, 소명 김좌겸, 백헌 김병로, 연수 김병구, 소야 김이중, 석봉 서병수, 모송재 고석구, 심재 김석익, 모헌 강철호, 만각 강석종, 야은 임성숙, 죽헌 김기수이다.

바위에 새긴 조설대.
바위에 새긴 조설대.

■ 면암 최익현과 귤암 이기온

문연사 이설비.
문연사 이설비.

잘 아시다시피 면암(勉菴 崔益鉉, 1833~1906) 선생은 19세기말 외세에 대항해 저항운동의 선봉에 섰던 유학자다. 언관의 자리에서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873년 겨울 제주에 유배와 13개월 만에 풀려 돌아간 뒤, 오랫동안 저항운동을 했고 결국 의병을 일으켰다가 대마도에 구금돼 단식 끝에 절명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문연사 이설비를 만난다. 문연사(文淵社)는 본래 제주시 오라동 2951번지에 있던 면암 최익현과 귤암 이기온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한 제단이다. 이설비에는 1977년 신제주 도시계획에 의거 이곳으로 옮기게 된 내력을 적었다. 그 위쪽에 橘巖(귤암)’이라 크게 새긴 바윗돌이 소나무 아래 비스듬히 놓였는데, 면암의 글씨라 하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이어 귤당 이선생제단이 나타나는데, 이기온(李基瑥) 선생을 모시는 단이다. 귤암은 제주에 위리안치 되었던 간옹 이익(艮翁 李瀷)의 후손으로 면암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고장 후진 교육에 큰 공헌을 했다. 동산 이곳저곳에 몇 기의 글을 새긴 바위가 있으나, 오래되고 이끼가 끼어 글씨를 분별하기 어렵다. <계속>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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