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서북청년단
이승만과 서북청년단
  • 뉴제주일보
  • 승인 2015.11.2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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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작가 / 칼럼니스트

요즘 낌새가 심상찮다. 이승만을 추켜세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4·19를 책상 깊은 곳에 파묻어버리고 역사를 지우려는 학자들도 생겨났다. 도민들은 ‘이승만’을 거론하면, ‘제주4·3’이 떠오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서북청년단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1946년 11월 30일 종로YMCA에서 서북청년단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완전 타도하는 투쟁 대열에 감연히 나설 것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심상치 않을 피바람을 몰고 올’ 선언을 하며 결성대회를 하는 자리에, 이승만은 비서 윤치영을 통해 화환을 보냈다. 이승만은 ‘서청’을 중요시했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은 서청단원들을 반갑게 맞으면서 이북 실정을 많이 묻고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격려했다. 태양처럼 우러러보던 거인이 30분 혹은 1시간씩이나 응대해주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서청의 배후에는 군정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으로부터 나왔으며, 굳이 경찰을 행동의 배후라고 한다면 돈암장은 정신적인 배후였다.

서청년단원들은 3·1사건 직후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북한 공산당 집단에 쫓겨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많았다.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판매하기도 했다. 경찰·행정기관·교육계에서 근무하는 단원들이 늘어났다. 3·1사건 전후의 활동가·혐의자·보석자·민주인사들과 그의 가족들마저 이유 없이 마구 체포· 투옥·학살을 공개적으로 자행했다.

서청 제주도본부가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다. 제주도본부 결성대회를 연 다음부터 서청에 의한 테러도 자주 발생했다. 그들에게는 정규 봉급이 아예 없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총성과 함께 한라산 주위의 여러 봉우리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항쟁이 시작되었다. 산중 무장대는 경찰지서 10여 개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테러집단을 공격했다.

서청단원들의 제주 파견은 ‘4·3’발발 이후 늘어났다. 4·3사건이 나자마자 서청단원 500명이 경찰전투대 요원으로 도착하였다. 서청단원들에게 ‘제주도는 악몽의 섬’이었고,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다. 서청단원들은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서청단원들이 투입되는 과정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개입했다. 그해 11월 중순께 제주경찰에 서청단원 200명이 배속되었고, 이들은 경찰로 급조됐다. 또 군인으로 이보다 훨씬 많은 대원들이 제주도에 내려 보내졌다. 200명의 서청 경찰대는 이른바 ‘2백명 부대’로 불렸다.

이승만은 사회단체의 용병술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서북청년단·대한청년단·반공청년단 그리고 예술종교단체·강패·불량배까지도 앞세워 자신의 정치기반을 닦거나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억압·제거하였다. 서청단원들은 담배, 엿, 양말, 비누 등의 수다한 대상(隊商)을 짜서 상인배로 가장하고, 거리와 부락들을 골고루 쏘다니면서 밀정을 도모하였다. 사용도 못 할 물품을 고가로 강요하였다. 거부할 경우에는 불쌍한 농민들을 무조건 빨갱이·통비분자로 몰아치어 집단적인 약탈과 살해하는 일이 도처에서 매일과 같이 악랄하게 진행되었다.

“너의 남편과 자녀는 관에 잡혀 사형 직전에 있으니 10만~50만원까지 내주면 석방시켜 준다”는 감언이설로 도민들을 꾀었다. 금품을 사취 강탈했고, 총칼의 협박 공갈로써 부녀자들을 능욕하는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부터 가장 규모가 큰 극렬 우익단체로 활동하였고 1948년 12월 19일 이후 해체되었는데 의외로 서북청년단의 단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은 얼마 안 되며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점차 한국사회에서 잊혀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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