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는 공덕
나이 드는 공덕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1.14 18: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가영 수필가

이사하면서 결심하고 책을 버렸다. 그래도 남아있는 몇 권을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냥 책꽂이에 꽂으면 될 걸 한두 장 넘겨본다.

나이가 들면서 읽었던 책은 그 내용을 이미 잊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처음 대하는 책처럼 신선하고 재미있다.

예전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 올 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월 전에 빌려다 본 것을 신작인 줄 알고 보다, 반쯤 지나서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머 내가 미쳤나봐하고 혼자 중얼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정리를 하다 보니 책도 같은 책이 여러 권 있었다. 읽고 나서 안 산줄 알고 사고, 또 샀나보다.

그래도 잊어버린 까닭에 같은 책을 신선하게 다시 읽을 수 있고 두근거리며 본 영화도 다시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이 든 공덕이 몇 개 있긴 있다.

대부분의 일은 용서하게 된다. 자신도 긴 과거동안에 우행과 잘못을 셀 수 없이 저질렀기에 타인이 같은 일을 범하면 나도 그랬으니까하고 이해를 하게 된다. 상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게 없어졌다.

가끔 화난 얼굴을 해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진짜 가치가 있는 것과 헛된 것과의 구별이 된다.

젊었을 때와 중년이었을 때는 아무래도 눈 앞에 보이는 명예와 성과에 마음을 뺏겼다. 차즘 주위에 지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살아간다는 일이 힘들고 슬프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다.

표면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소중한 게 무엇이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노년을 받아들여 누릴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즐거움을 크게 즐기고, 노력이 필요한 것은 노력하며, 이 사회에서 따돌림 받지 않는 노인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어렵다고 멀리 했던 한시와 종교서적을 읽으며 지내는 일도 노년의 덕분이다.

몽테뉴의 수상록도 오랜만에 다시 펼치니 젊었을 때 읽었던 맛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 것도 노년 덕분이다.

책은 드문드문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생애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책을 10권 정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감히 읽는 입장에서 용서를 빌고 말한다면 책을 읽을 때 행간의 하얀 부분이 좋다.

그 부분에 숨겨두고 비워 둔 깊은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비바람 맞으며 살아 온 인생이여야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또한 나이 드는 공덕일 테니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