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0.01.1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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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어제의 가치가 내일도 같은 비중을 갖는 ‘절대가치’이기를 바란다. 한 때 나도 그랬다. 과연 ‘영원한 가치’가 있을까.

절대가치란 게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는 걸 안 것은 나이가 먹어서였다. 누가 배워주지도 않았는데 ‘부모가 되어’ 알게 된 것도 있고 살면서 ‘애를 많이 써’ 알게 된 것도 있다.

남녀의 가치가 다르고 또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가치가 다르며 노인과 젊은이의 가치가 서로 다르듯이 가치란 ‘상대적’이다.

하나의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알고 난 뒤엔 마음이 훨씬 너그러워지고 또 삶이 풍요로워졌다. 소소한 일상의 일 하나하나가 나를 기쁘게 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사회는 절대가치에 여전히 매몰돼 있다.

지난 세기의 개념이었던 ‘이데올로기’와 ‘민족’에도 매달린다.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규정하게 된 가장 큰 뇌관은 좌우 이념 문제였다. 그 20세기에 4·3과 6·25. 이데올로기와 냉전의 살얼음판 위에서 대량 살육과 피의 악순환이 일어났다.

그런데 21세기에 절대가치 추구로 극단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는 보수와 진보, 경제는 경영계와 노동계, 광장은 조국은 넘어 윤석열과 추미애로 ‘쩍’ 갈라졌다.

이제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나온다. 우리의 조선시대 500여 년은 ‘상대적 가치’가 배제된 역사였다. 학문에도 일상의 생활사에도 이질(異質) 문화는 스며들 틈이 없었다.

그 망국(亡國)의 고질이 되살아났는지 나라가 극단의 대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절제와 타협도 중립지대도 안 보인다.

▲‘팩트’는 사라지고 오직 막말과 괴설이 난무한다.

서로 묻는 말은 하나 뿐이다. “너는 윤석열이냐 추미애냐.”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학자들은 정치권이 대중의 ‘극단적인 분노(증오)’를부추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엇이든 어디서든 극단의 쏠림은 위험하다. 균형추가 작동하지 않는 배는 복원력을 잃고 좌초하게 마련이다.

한 쪽 눈으로만 보고 한 쪽 귀로만 듣다보면 갈등은 분노와 증오로 달린다. 이런 반쪽 시청(視聽) 사회는 명백한 퇴행이다. 우리사회의 갈등 지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상 조사에서 늘 상위권이다.

이를 비용으로 환산하면 수백조원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다간 경제가 회복 불가능하고 문화도 활력을 잃어 자칫 ‘3류 국가’, ‘4류 사회’로 전락할까 두렵다.

▲건강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이념적 갈등을 없애자는 얘기가 아니다. 철저한 일당 독재체제가 아닌 이상 갈등은 불가피하다. ‘상대 가치’를 포용하는 이원화된 사회가 건강하다는 얘기다. 각 진영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대의(大義)를 중심으로 합리적으로 서로를 견제한다면 건강한 공생을 이어갈 수 있다.

4·15총선거 시즌이 “너는 어느 편이냐”며  ‘증오’로 달릴 조짐이다. 이렇게 양극단에 치우치면 극단적 대립과 갈등으로 서로에게 족쇄가 돼 공멸한다. 이번 총선에서는 극단의 ‘증오 정치’를 끝내고 ‘중도’의 합리적 이원화를 모색해야한다.

‘잘 살아보세’의 새마을 세대에서 방탄소년단까지 모두 함께 살아야 될 이 나라의 국민이다. 내편, 네편을 나누는 ‘증오의 정치’가 아니라 모든 이를 포용하는 중도의 정치인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여(與)던 야(野)던 모든 것을 다 차지하려다가는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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