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보내고 또 맞이하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보내고 또 맞이하며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12.3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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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숙 제주지방법원 가사상담 위원·백록통합상담센터 공동소장

2020년 경자년(庚子年)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한 해는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난 듯하다. 누구나 그렇듯 필자에게도 다사다난했던 시간이었다.

지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을 회상하며 아로새겨진 일들을 떠올려 본다.

봄빛이 눈부실 즈음에 제주지방법원이 주최하고 필자가 속한 상담센터가 주관한 미성년 자녀를 둔 재혼가정 캠프에 갔었다.

남편은 고기를 굽고 설거지를 했고, 아내와 자녀들은 잔디밭에 뛰놀았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새아빠, 새엄마와 몸을 비비며 끈끈한 가족애를 쌓았다. 새롭게 이룬 가정을 소중히 여기며 더욱 잘 가꿔 나갈 마음으로 만난 이들은 예기치 않은 아픔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자신을 향한 공부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부모 마음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햇빛이 충만한 여름날의 기억으로는 판사와 조사관, 상담위원들이 모여 사례회의에 열중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이혼과 비행, 가정폭력, 성본 변경, 양육비 지급, 면접교섭 이행 등 가족 문제를 해결하러 법원을 찾는 가족을 만나는 재판부, 그리고 심리전문가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할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했다. 이런 사례회의를 통해 가족 문제 해결 방향을 설정하고 재판부와 심리전문가가 서로 협력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가게 된다.

친엄마(혹은 아빠)를 만나려 하지 않는 아이, 부모의 죽음을 경험한 아이, 부모의 양육권 다툼에 위축된 아이. 그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의 길을 건강하게 걸을 수 있도록 양육 코칭을 잘하기 위한 방법들을 서로 논의하는 시간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했고 그만큼 살아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해줬다.

가을빛이 익어갈 무렵에는 천주교 살레시오 신부님이 이끄는 소년위탁보호 기관에서 자녀-부모를 연결하는 집단 상담을 시작했다. 그 시간은 필자에게도, 그 가족에게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질 때 자녀들이 집보다는 밖으로 돌아다니며 돈이 필요하면 훔치기도 하고 절제되지 못한 행동으로 비행을 저지르기 쉽다. 소년보호 재판에서 부모의 보호 범위를 벗어나 비행을 반복하는 아이들은 신부님이 운영하는 기관에 위탁돼 거기서 몇 개월 동안 생활하는데 그 안에서 아이들은 신부님들의 보살핌 속에 나름의 질서와 관계를 형성하며 그만뒀던 학교에 복학해 학교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어느 정도 비행과 멀어지면 가정으로 돌아간다.

공동체 생활 중 일부 아이는 답답함을 느껴 도망을 가는 행동을 보인 적도 있지만 신부님과 판사님, 그리고 부모님과 상담위원이 다시 한 번 아이들이 마음을 다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았다. 이제 아이들은 자신들과 일상을 보내는 신부님의 사랑, 처벌보다는 기다림을 선택한 판사님의 사랑,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늘 한결같은 숨결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게 됐다. 대학을 진학한 아이도 있고, ·고등학교 출석을 포기하지 않아 모든 아이가 다음 학년으로 진학하게 됐다.

위탁보호시설에 있지 않고 부모와 생활하는 보호소년을 대상으로 제주지방법원에서 주최한 소년보호 캠프도 필자가 속한 상담센터에서 진행했다. 보호소년과 부모가 함께 체험하고 여행을 떠난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집이 아닌 호텔에서 식사와 잠을 자도록 했다. “밤새 도란도란 이야기하느라 잠을 못 잤다이렇게 많이 이야기해 본 것은 처음이라는 가족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이제 비로소 아이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했다.

이번 겨울 연말에는 나를 위한 휴식 시간을 만들어 그동안 읽으려고 쌓아뒀던 책을 실컷 읽었다. 그 중 임수희 판사가 쓴 처벌 뒤에 남는 것들-회복적 사법 이야기라는 책이 인상 깊었다. 회복적 사법은 법원의 역할이 판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 회복, 가족 관계 회복 등을 통해 사회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다. 물론 이 제도를 시행하려면 많은 예산과 각 분야 전문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돌아보니 지난 사계절 동안 필자는 마음이 따뜻한 존재를 곳곳에서 많이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어두운 길을 걷는 이웃들에게 불을 밝히고 손을 내밀어 함께 걸어가자 청하는 마음, 그 마음을 새해에도 느끼고 나누며 살아가려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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