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체
나의 정체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12.2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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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식 시인

내가 과연 누구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릴 때부터 나인가, 이름이 생기고 나라는 인식으로 나에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오감을 느낄 때부터 내가 성립되는가?

남과 다투어서 마음이 불안하거나 공부를 잘 해서 우등상을 받거나 암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늘 불안하게 사는 나나 차를 몰다가 잘못해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고촉박이나 뜻밖의 유산을 물려받아서 오만해도 되는 내가 진정한 나란 말인가?

가난하게 살던 미망인이 나이 차가 많은 남자와 재혼해서 잘 살았다. 노인은 얼마 없어 세상을 떠나며 후처에게 유산을 물려주었다. 얼마나 유산을 많이 물려주었는지 그 노인의 행적이 주변에서 회자 되었는데 그 소문이 노인의 정체인가? 그 미망인의 실체는 가난했던 미망인인가? 노인의 유산 상속을 받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현실이 정체인가?

가상이지만, 한 때 급우로부터 부당하게 돈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급우는 서클이 있어 여럿이 에워싼 자리에서 폭행도 가했다. 복수의 칼날을 가느라고 근육을 키우고 무술 고단자가 되었다. 예비군 훈련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놈을 불러내어 으슥한 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자백하건데 반 죽여 놓았다. 속이 후련했다. 절치부심, 증오로 가득 찼던 나와 통쾌하게 복수를 결행한 나는 같은 나일까?

지금이 가장 귀한 금이고 만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소중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데 합당한 결론인가? 그렇다면 과거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미래는 그림일 뿐이라서 지금 벌어지는 사실만이 진실인가?

늙어보지 못 한 젊은이와 달리 노인은 한 시절 젊어보았으니 왕년의 관록을 지니고 있다. 정년퇴임하기 전까지는 관운이 좋아서 승승장구한 여유로 가정살림도 원만해서 남에게 꿀릴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운동 삼아 거리를 걸으면 아는 사람인데 인사도 없이 모른 척 스쳐지나버린다. 반갑다는 인사도 그 때와 다르므로 이제 평범한 노인이 되었으니 왕년의 관록으로 평생 동안 우려먹지 말라는 메시지 같다. 그러므로 알아도 모른 척 해야 하고 조금 손해 보더라도 참아야 한다. 그 무식을 위한 가장이나 부당한 대우를 견딜 배포는 자신이 처한 지금을 기준으로 점수를 정하여 절대 겸손해야만 구할 수 있는 미덕이다.

십대에 뜻을 세우고 십년 단위로 힘을 써서 칠순이 넘도록 정진하였다면 나름으로 그 분야에선 살아있는 귀신이 되기도 한다. 겸손한 태도로 비법을 원했을 때 기꺼이 전수했음에도 후학이 권위가 높아지니까 사사한 사실을 깡그리 지우려고 언제 봤냐는 자세가 배신감이다. 이보다 지독한 경우는 혼자 영특하면 고립시키는 행태다. 타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일로 오래 우려먹어야 하기에 선지자를 애초부터 제외시키는 작태가 발생한다.

이 부당한 따돌림,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억울한 처사에도 침묵으로 견디는 사례가 많음을 알고 있기에 그리저리 겸손을 부여안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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