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 대신 사진기 든 심방...굿판서 무형유산 길어올리다
방울 대신 사진기 든 심방...굿판서 무형유산 길어올리다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9.12.01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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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14.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故 김수남
1980년부터 전국 누비며 굿판 촬영...전통유산 가치 재조명, 미신 타파 대상서 인식 전환
아시아 샤머니즘 기록으로 확장...유족들, 도에 17만컷 기증 "사투리 등 고향사랑 남달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고(故) 김수남.

 

김수남(1949~2006)은 평생 굿판을 누볐다.

굿판에서 울고 웃던 그를 사람들은 큰 심방(무당)”이라 불렀다.

김수남은 굿에 대한 인식을 미신 타파의 대상에서 소중한 전통 문화유산으로 바꿔놓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그는 국내 무속신앙을 넘어 아시아 소수민족의 샤머니즘까지 필름에 포착했다. 시베리아에서 적도까지 샤머니즘의 궤적을 따라 순례하며 인류 무형유산을 카메라에 기록했다. ‘아시아의 작가로 불린 이유다.

평소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현장에서 죽어야 한다던 그는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리수족의 신년맞이 축제를 취재하다가 뇌출혈로 홀연 세상을 떠났다.

 

사진기 든 큰 무당인류 무형유산 기록

굿이란 무엇인가. 아마 삶과 죽음, 고통과 환희, 좌절과 희망, 이러한 것들을 가장 극렬하고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굿판일 것이다. 사회와 시대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그래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까지 변해버린 하나의 신앙체계, 이것을 찍으며 하나의 증언, 하나의 기록이 될 수 있기를 꿈꾸었다.’(김수남의 글 살아있는 신화 아시아중에서)

김수남은 제주시 한림 출생으로 연세대 재학 중 우연히 카메라를 선물 받고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월간지 세대와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1980년부터 굿 사진을 찍었다.

새마을운동 이후 미신 타파란 이유로 굿을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생전 김수남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 때문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1985년 동아일보에서 퇴직한 김수남은 더욱 왕성하게 전국의 굿판을 누볐다.

그에게 굿은 하나의 문화였으며 굿판은 종합 예술무대였다.

김수남은 한국의 굿판을 섭렵한 후 1988년부터 보폭을 넓혀 국경을 넘었다. 아시아로 시야를 확대한 그는 토속신앙을 집중적으로 촬영했다. 인류의 무형문화를 탐구했다.

아시아 대륙의 오지와 섬을 돌며 언제 맥이 끊길지 모르는 소수민족의 처절한 삶과 문화를 카메라에 기록했다. 일본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타이완, 필리핀, 중국의 남부,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인도 북부 등을 돌며 샤머니즘의 흔적을 앵글에 담았다.

그것은 근대화와 개발의 바람에 밀려 사라지는 아시아 각국 전통문화의 원형에 대한 기록이었다. 예술적인 감흥은 물론 인류의 문화유산 자료로써 가치가 크다는 평가다.

김수남은 1983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의 굿시리즈(20)를 완간했다. 제주도 무혼굿과 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전라도 씻김굿, 함경도 망묵굿 등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던 무속신앙에 대한 기념비적 기록물이다.

김수남은 2004아름다움을 훔치다를 출간했다. 무속인과 광대, 소리꾼, 춤꾼이 주인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소리와 춤으로 위로해주던 예인 11명이 글과 사진으로 소개됐다.

제주심방 안사인, 곱사춤 공옥진, 광대 이동안, 만신 김금화, 명창 김소희, 도살풀이 김숙자, 범패승 박송암, 학춤 한영숙, 가야금 산조 성금연, 밀양 양반춤 하보경.

한때 천하다고 멸시받으며 역사 속에 박제화 되던 민중사의 예인들이다.

김수남은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눈을 지닌 큰 무당이다. 단지 방울과 부채 대신 사진기를 들고, 공수를 내리는 대신에 셔터를 눌러 자기가 본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보통 무당과 다를 뿐이다.”

김수남과 함께 20여 년간 굿판을 누볐던 김인회 전 연세대 교수(한국굿학회 회장)의 말이다.

김 전 교수와 김병익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김민기 학전 대표 등은 고인이 타계한 그해 김수남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1주기 때 출범시켜 그를 기리는 사업을 추진해왔다.

 

울기만 하는 심방탁월한 공감능력

1981년 음력 2월 보름. 김수남은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바닷가에 있었다. 갯바람이 매서웠다.

안사인 심방을 따라나선 참이었다. 천막이 설치되고 무혼굿이 펼쳐졌다. 바다에 빠져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며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굿판이었다.

김수남은 아들을 먼저 보낸 노모와 가족들의 사연을 듣고 많은 눈물을 쏟았다.

고산리 굿판에서 그는 육필로 메모를 작성했다.

몹시 추웠다. 음력 이월 아직도 매서운 갯바람이 불었다. 멍석을 깔고 보낸 바닷가 천막에서의 23일 무혼굿을 보며 나는 많이 울었다. 어딘들 그렇지만 젊은 아들을 보낸 노모,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의 슬픔, 비명에 떠난 사람도 그렇지만 남아있는 가족들 생각 때문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큰 심방이란 별명을 얻었다.”

김수남이 살아있는 굿 사진을 찍은 비결은 탁월한 공감능력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덩실덩실 춤추고 막걸리 잔을 함께 기울이며 피사체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서 셔터를 눌렀다. 제주 굿판에서 매번 펑펑 눈물을 쏟는 김수남을 본 사람들이 저 심방(김수남)은 왜 굿은 안하고 울기만 하느냐라고 물을 정도였다.

김수남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누비며 격랑이 몰아치는 삶의 현장을 촬영했다. 시베리아에서 적도까지 민속신앙의 궤적을 따라 순례했다. 한해의 절반은 한국을 떠나 있었다.

그를 일컬어 한 평론가는 우리에게 아시아의 속살을 제대로 보여준 사람이라고 했다.

김수남은 제주 출신다운 시선으로 해풍과 파도에 맞서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을 필름에 붙들었다. 검푸른 바다에서 생의 끈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애환이 관통했다.

일본 오키나와의 바다, 타이완 소수민족 야미족의 어촌, 베트남 메콩강의 수상시장, 장대 낚시를 하는 스리랑카의 가난한 어부.

김수남은 한 산문에서 아시아는 한 사람의 사진가가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넓고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썼다. 생전 그는 17만 컷에 달하는 방대한 사진을 찍었다.

2017년 유족들은 고인의 작품과 유품을 제주특별자치도에 기증했다. 작가 사인이 들어있는 사진 146점과 카메라, 메모수첩 등 유품 62, 사진 디지털 파일 17만점이다.

같은 해 제주도는 제주시 원도심 탐라문화광장 내 여관건물인 옛 금성장과 녹수장을 리모델링해 산지천갤러리를 조성하고, 그해 첫 전시로 김수남 작가의 사진을 선보였다.

앞서 2015년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김수남의 9주기 회고전 () 끝없는 기억이 열렸다.

전시를 찾은 미망인 이희영 여사는 남편은 제주 사투리마저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제주를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라며 남편은 생전에 제주에 내려가 작은 갤러리를 열고 여생을 보내자고 했었다. 전시회가 남편의 꿈 일부를 실현해 준 셈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고인의 아들 김상훈씨는 아버지가 의미 있는 일을 했고 제주를 사랑했던 사실을 도민들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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