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풍미한 국민가수, 한국 대중문화의 기틀을 닦다
시대 풍미한 국민가수, 한국 대중문화의 기틀을 닦다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9.11.24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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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찔레꽃' 가수 백난아
콩쿠르 휩쓸며 10대 때 가수의 길 입성
해방 후 '찔레꽃' 인기로 국민가수 반열
독보적인 레코딩 가수로 해외 공연까지
"시대 굴레 깬 리더십 강한 선각자 평가"
제주여성 강인한 기질 예술로 승화 울림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제주출신 가수 고()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의 첫 소절이다.

백난아는 10대 때 콩쿠르 우승으로 데뷔해 20대 때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백난아는 여기 머물지 않고 남성도 어려운 악극단을 조직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변방 출신으로 최고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그녀의 삶에 제주여성의 강인한 기질이 관통한다.

옛 명월국민학교 입구에 그녀의 기념비가 서있고 학교 건물에는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노래 재능국민가수 반열에 오르다

백난아의 본명은 오금숙(吳金淑)이다. 1927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서 오남보씨의 3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딸 중에는 넷째다. 당시 명월리는 오씨의 집성촌이었다.

오금숙이 3살 때 가족이 만주로 이주했고 그녀가 9살 때 함경북도 청주에 정착했다.

노래를 좋아하던 오금숙은 동덕보통학교 6학년이던 1940년 빅타레코드사가 주최한 청진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고 북성여중에 입학한 후 콜럼비아레코드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오금숙은 15세 때 태평레코드사의 레코드예술상 회령대회에서 1위를 한 후 본선에서 공동 1등에 오르며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걸었다.

당시 나그네의 설움을 부른 가수 백년설이 오금숙을 양딸로 삼았다. 백난아란 예명은 그 때 백년설이 자신의 성을 따서 붙였다. ‘난초처럼 청아하다는 뜻이다.

특히 백난아가 1941년 취입한 찔레꽃은 단연 불후의 명곡이다. 당초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지만 1945년 해방 후 국민들의 가슴 속 향수를 자극했다. 시쳇말로 차트 역주행이었다.

국민가수 백난아의 등극이었다. 광복 직후 인기가 급상승한 여가수는 많았지만 레코딩가수로 성공한 이는 백난아가 독보적이었다.

백난아는 일본에서도 톱 가수 대접을 받으며 순회공연을 했고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 부족으로 레코드산업이 전면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만주 공연을 다녔다.

히트곡도 차고 넘쳤다. ‘아리랑 낭랑’, ‘갈매기 쌍쌍’, ‘낭랑 18’, ‘직녀성’, ‘망향초 사랑’, ‘무명초 항구’, ‘아주까리 선창’, ‘간도선’, ‘인생극장’, ‘금박댕기. 훗날 낭랑 18는 제주출신 가수 한서경이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며 백난아를 대중 곁으로 소환했다.

시대를 풍미하며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백난아는 1960년대까지 왕성하게 신곡 취입활동을 한 뒤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린 후 백난아는 방송에도 활발하게 출연했다. 1985년 첫 전파를 탄 KBS 프로그램 가요무대에 원로가수로 자주 출연했다.

지금까지 찔레꽃은 가요무대 사상 가장 많이 불린 국민가요로 유명하다.

백난아는 1989년부터 제주그랜드호텔(현 메종글래드 제주호텔) 전속가수로 활동하던 중 폐암이 발병해 투병하다 19921월 타계했다.

생을 마감하기 3년 전인 1989년 백난아는 자신의 히트곡 53곡을 묶은 백난아의 히트 애창곡집’(현대음악출판사)을 펴냈다. 작사가 반야월유호, 작곡가 박시춘손목인 등 이른바 한국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들이 작성한 축하의 말씀이 책에 수록돼 있다.

손목인은 이렇게 썼다.백난아! 그대 뜨거운 가슴으로 대중들을 사랑하였으니 대중들 또한 고운 그대를 영원히 잊지 않고 사랑하리라. 언제나 푸른 넋으로 살았고 언제나 하얀 순정으로 견딘 그대 백난아.’

 

제주여성 강인한 기질 예술로 발현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가 펴낸 제주여성사 자료총서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에 백난아는 언론문화체육 분야 인물 중 첫 번째로 소개됐다.

한국 대중문화예술의 기틀을 다잡은 선각자로 평가받았다.

생전 백난아는 여장부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백난아는 해방 후 직접 파라다이스 쇼단을 운영하며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충무로 소재 일본인 집을 매입해 양재학원을 설립하고 서울극장 경영에도 관여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선 남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내 문화계 일각에선 백난아의 행보로 한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의 물꼬가 트였다고 평가한다. 전쟁포화 속에서 10살이던 이미자는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를 꿈꾼 것으로 알려졌다.

백난아는 결코 고향을 잊지 않았다. 백난아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백난아는 1957년과 1961, 19863차례 현인과 함께 제주를 찾아 한림문화관(옛 한림극장)에서 공연했다.

명월리지()1957년 백난아의 공연이 기록돼 있다. 백난아는 현인과 함께 한림문화관을 찾아 무대에 올랐다. 고향인 명월리 주민들도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백난아가 명월 출신이란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마을지에 수록돼 있다

백난아기념사업회 오경욱 초대회장(77)과 양성찬 회장(56)백난아는 행적으로 봐도 리더십이 뛰어난 여장부라며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시대적인 굴레를 깨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돼야 한다. 제주여성의 강인한 정신을 세상에 떨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난아의 히트 애창곡집에 실린 고인의 인사말은 국민가수다운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 찬바람 불던 식민 치하의 무대에서, 만세소리 드높던 해방의 무대에서, 포연이 자욱한 625의 무대에서 뜨겁게, 뜨겁게 성원해 주시던 팬들의 박수소리,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

 

 

백난아 고향이 청진? 오류정보 떠돌아출생연도는 1927

백난아는 한때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으로 잘못 알려졌다. 인터넷 특성 상 지금도 일부 오류정보가 떠돌고 있다.

오경욱 백난아기념사업회 초대회장은 2007년 기념사업회 결성과 2009년 백난아가요제 첫 개최에 앞서 백난아의 신상명세를 모두 살펴 제주 출신임을 확인했다.

오 전 회장은 당시 명월에 거주하던 백난아의 6촌 오성종씨와 서울에 살던 백씨의 오빠 오택규씨를 만난 후 제적등본 등도 다각도로 확인한 결과 명월 출신이 분명했다고 강조했다.

오류 정보와 관련해 오 전 회장은 백난아가 태평레코드사 전속으로 활동할 때 그녀를 양녀 삼은 백년설이 고향을 청진으로 쓰게 하면서 잘못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백난아의 출생연도도 인터넷 등에 1923년과 1925, 1927년 세 가지가 돌고 있다.

오 전 회장은 제적등본에 1925116일로 나와 있고 연예인카드와 주민등록번호, 이력서 등에는 1927516일로 기록돼 있다가족들을 만나 실제 출생연도를 확인하고 본인이 연예인카드 등에 직접 썼던 1927년생이 유력해 기념사업회도 이를 공식화했다고 말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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