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움직이는 글씨, ‘활판’의 매력을 만나다
살아 움직이는 글씨, ‘활판’의 매력을 만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11.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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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2008)

산문시의 거장 정진규 시인 시선집
직접 고른 100편 시 수록 한정판 출판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시월, 2008) 케이스와 책 표지.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시월, 2008) 케이스와 책 표지.

집집마다 책을 정리하는 시즌이 되면, 하루에도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책을 수거하곤 한다. 언젠가는 다섯 곳에서 책을 인수하느라 하루 종일 책방 문을 못 열었던 적도 있다. 이렇게 새로 들어온 책들은 대부분 우리 식구가 된 그 날 바로 정리하는 게 원칙이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거나 수량이 너무 많아 힘들 경우엔 잠시 미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상자에 담아온 책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깜빡 잊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그럴 때면 책을 주신 댁에서 서둘러 포장하느라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책들과 뒤늦게 상봉하는 소소한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요즘 광주다 서울이다 도외 출장을 다니느라 한동안 정신없다가 어제도 좀 마음의 여유를 갖고 보니 기억에 없는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구체적으로 언제 입수된 책들인지도 가물가물하지만 궁금해서 열어보니, 그 안에서 공을 들인 티가 줄줄 흐르는 시집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시집 치고는 아주 두툼한 두께에, 천을 대 책 형태로 만든 케이스까지 남다른 외관을 가진 책이었다. 케이스 안에는 비록 인쇄한 거지만 시인이 직접 쓴 시가 담긴 천과 아름답게 장정된 시집이 담겨있었다. 시집의 안팎에 담긴 모든 것들이 특별하다.

저자 육필 원고.
저자 육필 원고.

그 책이 바로 월간지 현대시학(現代詩學)’ 주간과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우리나라 산문시의 거장 정진규(鄭鎭圭 1939~2017) 시인의 활판본(活版本) 시선집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시월, 2008)이다. 이 시선집은 시인이 직접 고른 100편의 시를 수록해서 1000부 한정판으로 출판됐다. 시집의 앞부분에 시인이 직접 쓴 육필 원고가 담겨 있는데, 각기 다른 내용이라 책 전부가 다 세상에서 한 권밖에 없는 유일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납 활자 인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출판도시 활판공방(活版工房)에서 2008년부터 출판하는 한국 현대 시인의 보존판 활판본 시선집 시리즈 첫해 다섯 권 가운데 한 권이다. 특수 한지를 사용해 500년을 보존할 수 있고, 모든 활자를 주조하고 한자 한자 식자(植字)해서 조판하고 공을 들여서 한권을 제작해서 출판하는 데 한 달반의 시간과 품이 든다고 하니 그 수고로움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인쇄라도 요즘 유행하는 잉크 토너로 뿌려진 프린트(print)와는 다른 눌러서 찍은(press) 활자만의 매력을 시인은 만져지는 글씨, 살아 움직이는 글씨, 그래서 활판(活版)’이라했다. 또 이런 활판본(活版本) 시집을 이 혼수(昏睡)의 디지털 시대에 갖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성성(惺惺)이요 적적(寂寂)이다. 큰 축복이다.’라며 그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전각 작품.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전각 작품.

이 책의 판권에는 활판 인쇄에 품을 들인 분들 외에도 시집에 사용된 지은이의 인장 여섯 과()를 제작한 전각(篆刻) 장인과 장정한 북 디자이너 등 이 책을 제작하는 데 함께 한 많은 이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자 각자 맡은 부분에 대한 책임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시인도 시집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詩集(시집) 엮기도 하나의 아름다운 ()이다라고. 간만에 보는 아름다운 책이다.

자서(自序).
자서(自序).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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