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 거목’의 40년 한 길 ‘4·3’…진실의 빛 밝히다
‘문학계 거목’의 40년 한 길 ‘4·3’…진실의 빛 밝히다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9.11.18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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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소설가 현기영
현기영 작가가 4·3과 자신의 문학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하며 활짝 미소짓고 있다.
현기영 작가가 4·3과 자신의 문학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하며 활짝 미소짓고 있다.

20년 영어교사 생활을 접고 1975년 등단한 이후 노(老) 작가에겐 평생 ‘4·3’이 따라붙었다. 14년간 빨간 딱지가 붙었던 소설 ‘순이삼촌’(1978년 작)이 세상에 태어난 지 40년이 흐르는 사이 4·3은 빨갱이들의 폭동에서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자리 잡았고 그 역사적 평가를 일궈내는데 걸린 오랜 시간 동안 누구보다 역할을 해온 이가 현기영 선생(78)이다. 최근 문화예술발전 공로로 문학 부문 은관문화상을 수상한 노 작가를 만났다.

 

‘순이삼촌’으로 ‘민간인 학살’ 참극 알려
국가폭력 무고한 희생 규명·치유 힘써
역사문학 창작 공헌…은관문화상 영예

 

은관문화상(문학 분야) 수상 소감을 먼저 묻자 잠시 뜸을 들인 현기영 작가는 “문학으로서 역사를 썼다고 생각한다. 내 문학, 현기영 문학이라는 것이 순수문학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순수문학을 하는 선배들이 상을 받았다. 상찬 (賞讚)은 공식적으로 ‘4·3에 대해 정부가 평가해주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어서 기분이 새롭다”라고 몸을 낮췄다.

오랜 세월, 그를 따라다닌 ‘4·3 작가’라는 이름은 그림자와도 같았다. 일곱 살 나이, 노형마을이 ‘활활’ 불에 타올라 마을 밖 언저리에 서있던 아이의 얼굴까지 벌겋게 전달됐다.
마을 전체가 불타는 그 화염의 공포는 ‘우리집은?’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게 했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어눌한 말투와 말 더듬는 버릇도 그의 성장과 함께였다. 펜을 잡고 원고지를 펼칠 때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공포의 열기는 이내 기억 속에서 뿜어져 작가를 열병에 가뒀지만 30년간 4·3을 망각과 침묵으로 강요받던 시절 북촌리 대학살을 세상에 꺼내 들었다. 4·3의 진실이 비로소 시대의 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 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순이삼촌’ 중


 

‘천지가 진동할 통곡 소리’가 세상에 알려지자 1979년 군(軍) 정보기관은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그를 서울사대부고 교무실로 연행,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보안사에서 갇혀 지내던고통의 한 달간을 그는 ‘화탕지옥(火湯地獄)’ 같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고문은 인간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빼앗아갔고 글 대신 술이 그를 차지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해결될 수 있는 슬픔이 문학이라면 4·3은 문학이 결코 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표현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4·3 글쓰기’의 힘겨운 시간을 이야기하곤 했다. 4·3을 다룬 또 하나의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년 작)가 나오자 국방부는 또다시 ‘불온도서’로 낙인을 찍었다.

문학으로, 강연으로 4·3과 함께 해온 그의 이야기는 줄곧 한 가지다. 국가폭력이 가져온 야만의 역사를 온전히 드러내야 그 대학살의 난리통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이고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4·3의 기억운동, 기억 투쟁이다.
“4·3을 돌아보시라. 5만명이, 3만명이 죽었다.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4·3에는 5만명의, 3만명의 이야기가 있는 거다. 거기서 살아남은 이들, 망각을 강요당해 화석처럼 굳어버린 그들에게 다시 피가 돌고 살을 붙여 숨을 부여해 말을 하도록 하는 것이 기억 투쟁이다. 4·3추념식 70주년, 71주년을 보냈지만, 생존희생자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여전히 30년 전 시계에 갇혀있다. 말조차 못 하게 억압해온 망각의 정치였다. 그걸 발랄하게 생생하게 드러내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트라우마로써 기억이 아니라 억압돼 있던 기억을 복원하자는 말이다.”

 

제주 공동체 미래로 나가기 위해서는
‘항쟁과 수난’의 양면성 모두 인식해야
앞으로 희생자 넋 위로하는 심방 꿈꿔

 

그는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2016년작)에서도 4·3의 아픔을 극복하는데 제주공동체가 가진 치유의 힘을 이야기했다.
“옛사람들도 말하기를, 독난리는 견디기 어려워도 몰난리는 견딜 만하다고 했다. 독난리는 혼자 겪는 큰 불행이고 몰난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겪는 큰 불행을 말한다. 4·3, 그야말로 몰난리지. 나만 아는 게 아니고 전체가 다 겪은 거여서, 개인의 억울함이 아니고. 근데 그 말을 쓸 수가 없더라고. 그래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고, 우리 집에만 닥친 불행이 아니라 섬 전체에 닥친, 그런 거로 위안이 되는 거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난리를 겪고 제주섬을 온전하게 일궈온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다. 4·3 기억 투쟁은 그래서 개인의 삶과 전체를 함께 조망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미래의 업보가 된다. 제주 사회의 미래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친일 청산 없이 해방을 맞은 미군정 당시 3·1 시위에서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어린아이들까지 죽어가지 않았다면, 미군정이 사과하고 공산주의 책동으로 몰아가지 않았다면 3·10 총파업은 양상이 달라졌을 거다. 미국과 소련의 분할통치를 반대했던,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곳이 제주였고 그래서 탄압으로 이어졌던 것 아닌가? 4·3은 아직도 역사의 굽이굽이 진상규명되지 않은 일이 많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터에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4·3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재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노 작가는 그러면서 ‘4·3은 수난과 항쟁’ 양면성을 아우르는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4·3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 미래를 위한 것 아닌가? 과거의 문제로 치부하고 수난으로만 기억해서도 안 되고, 항쟁으로만 기억해서도 안 된다. 권위주의 시대 사람을 억압하고 통제하던 것에서 자유와 자율, 평화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항쟁과 수난’의 양면성을 다 볼 수 있어야 제주가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

4·3 작가 현기영의 앞으로 역할을 물었다.
“이제 내년이면 팔십이다. 지력도 떨어지고, 좋은 글이 나오리란 확신도 없다. 4·3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연으로 돌아가신 영령들을 잘 위로하는, 진혼하는 심방 역할이나 해볼까 한다.”

그러면서 그는 “심방이 어울릴까”라며 웃어보였다.

현기영 소설가는
1941년 제주시 노형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 소설집 ‘순이삼촌’(1979)·‘아스팔트’(1986)·‘바람 타는 섬’(1989)·‘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누란’(2009), 산문집 ‘바다와 술잔’(2002)·‘젊은 대지를 위하여’(2004)를 출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했으며 신동엽문학상(1986), 만해문학상(1990), 오영수문학상(1994), 한국일보 문학상(1999) 등을 수상하는 등 한국 문학계의 거목으로 역할을 해왔다. 올해 제주4·3평화상을 수상했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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