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11.1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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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논설위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답은 비과학적인 꿈으로 격하됐다.

그 대신 과학이란 미명 아래 ‘경쟁’과 ‘약육강식”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더나가 마땅히 그래야 할 도리가 됐다. ‘경쟁”과 ‘약육강식’이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 모두가 따라야 할 도리가 된 책임은 대게 다윈에게 돌려진다. 다윈은 ‘자연선택’을 이야기했을 뿐 ‘약육강식’을 주장하지 않았다. 자연에서는 ‘약육강식’과 반대로 육식동물인 상위포식자가 가장 먼저 멸종한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은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을 ‘약육강식’으로 바꿔치기 한 사람은 스펜서다. 스펜서와 그의 후계자인 사회진화론자들은 제국주의가 발전하던 시기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해석했고, 그것은 제국주의와 함께 널리 퍼졌다.

뒤르켐 같은 사회학자는 스펜서와는 반대로 인간이 경쟁을 피하려고 노력하면서 분업 등 중요한 사회 발전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는데, 다윈의 진화론은 뒤르켐의 해석에 가깝다. 경쟁을 피해 사막으로 간 낙타는 아직까지 번성하지만 초지에 남았던 유사종은 거의 멸종돼서 라마와 알파카 등 일부가 남아메리카에서만 살아남았다. 이것은 단지 동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생인류인 우리들이 빙하기에 살아남은 건 경쟁의 결과가 아니고 협력의 결과였다.

빙하기 이전까지 지구에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조상이 함께 살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 보다 체격도 크고 힘도 센 강자였다. 그런데 네안데르탈인은 왜 빙하기를 견디지 못 하고 멸종했는데 약한 호모사피엔스는 살아남았을까?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큰 집단을 형성해 서로 접촉하고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여 사회적인 진화를 이룩했다. 공동체를 이루어서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해 빙하기라는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 노래와 춤, 신화, 종교 같은 비생산적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2만년 전에 만들어진 토기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현생 인류는 언어 능력을 키우고 추위 속에서 살아남는 비법을 함께 나눴다.

최근의 신경생리학적 연구성과 역시 또 다른 각도에서 사람이 연대와 협력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이며 신경생물학자인 요아힘 바우어는 인간을 움직이는 핵심적 동기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정·존중·배려·애정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동기와 행복을 부여하는 신경물질인 도파민, 엔도르핀, 옥시토신 등이 사회적 결속과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통해서 분비된다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모든 인간은 신경생물학적으로 사회적 공감과 협력에 소질이 있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적 연구나 신경생리학적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인간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식 ‘약육강식’이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다. 또 ‘경쟁’과 거기서 승리해서 얻을 수 있는 부나 권력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분명해지고 있다.

다윈, 스펜서, 톨스토이는 거의 비슷한 시대에 살았고 인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각기 다른 답을 내놨지만 최후의 승자는 톨스토이가 아닐까? 공감과 협력이 인류를 살렸다면 인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사회도 교육도 경쟁이 아니라 공감과 협력을 진작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할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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