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로프시의원-시립 박물관장으로 활동...'제2의 제주인'
박물관 내 한국관 조성 추진...제주두루나눔과 5년째 교류
강제 징용 속에 지켜온 한국인-제주인 정체성 수호 앞장
러시아 사할린에 사는 한인 중에 고영순씨(65‧여)가 있다.
한국인 재외동포 2세로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시의원으로 활동하는 고씨는 제2의 제주인이다. 한 살 위였던 남편 고(故) 고운용씨가 제주 출신이다. 본인은 충청도 출신이다.
결혼생활에서 남편을 통해 제주인 특유의 정신을 공유했고 사별 후에도 제주를 잊지 않았다. 고씨가 지난달 12~14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9 세계제주인대회에 참석했다.
▲한국인‧제주인 정체성 수호 앞장
고씨는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시 한인회장으로 제주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 왔다.
마카로프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북쪽으로 210㎞가량 떨어진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한인들이 강제 징용돼 탄광과 전력‧제지공장 등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세계제주인대회에서 만난 고 회장은 “9월 추석 때 다른 도시에 사는 제주인까지 모이면 산소에서 차례를 지낸 후 조그맣게 축제를 연다. 제주인 특유의 동네잔치가 된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2015년부터 제주탈춤극단 제주두루나눔(사단법인 한문화네트워크)과 교류를 지속해왔다. 그해 마카로프시 정부와 한인회가 공동 주최한 ‘광복 70주년 및 러시아 승전 70주년 기념 문화축제’에 제주두루나눔이 특별 초청돼 강제 징용된 한인 동포들을 위해 공연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오찬에서 보드카와 한라산소주, 연어 알과 대게, 김과 김치 등이 오갔다.
고 회장이 이끄는 마카로프시 한인회가 매년 초 제주들불축제에 참가하면 7월 마지막 토요일에 마카로프에서 열리는 ‘우리는 함께 있다’ 축제에 제주두루나눔이 참가해 왔다.
고 회장의 또 다른 직함은 마카로프시립 박물관 관장이다.
고 회장은 박물관에 한국 관련 전시관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고 회장이 사할린 정부에 박물관 내 한국관 조성을 지속적으로 호소한 끝에 예산을 확보하고 얼마 전 증축공사에 착공했다. 제주두루나눔도 박물관 내 한국관 조성 추진 소식을 듣고 모금활동으로 2100여만원을 모아 2017년 마카로프 방문 때 고 회장에게 전달했다.
마카로프시립 박물관 내 한국관은 380㎡ 규모로 2020년 말 전후로 준공될 예정이다.
고 회장은 “한국관은 강제징용관 성격”이라며 “강제징용 한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경상도는 물론 제주와 전국 관련 자료가 전시될 것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시는 고 회장을 통해 제주 초가와 해녀 관련 자료들을 보냈다. 고 회장은 “제주들불축제를 찾았을 때 고희범 제주시장에게서 해녀 관련 자료들을 전달받았다”고 소개했다.
한문화네트워크 대표인 심규호 제주국제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마카로프시립박물관 내 한국관은 세계 유일의 징용 전문 박물관이 될 전망이다.
심 교수는 “일본 홋카이도에 징용 관련 작은 전시공간이 있지만 박물관으로 보기엔 무리다. 마카로프시립박물관 내 한국관이 생기면 세계 첫 징용박물관으로 점점 잊히는 징용역사를 조명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일본 정부가 강제 징용 자료들을 꽁꽁 숨겨 왔는데 과거사를 치유하고 민족 간 용서와 화해를 위해 자료를 내놔야 한다”고 비판했다.
▲제주여성 강인한 정신 계승할 것
고 회장에 따르면 2010년 기준 마카로프에 거주하는 한인은 559명밖에 남지 않았다. 한인 동포 1세대들이 세상을 뜨고, 2세와 3세들은 대도시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고 회장은 “남편도 그랬고 제주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공부도 잘 한다”며 “제주인이 따로 모여 사는 제주인구역이 있는데 최근 실거주자는 25~26명밖에 안 된다”고 전했다.
고 회장은 “제주 여성은 강인하다. 사할린이 엄청 추운데도 악착같이 온갖 궂은일을 해내며 가족을 부양한다”며 “제주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후세에 계승되도록 교육과 교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할린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한인이 많은데 제주방언은 금방 티가 난다. 투박하지만 정겨움이 묻어나는 방언이 제주인과 닮았다”고 덧붙였다.
심규호 교수는 “마카로프 방문 때 고영순 회장에게서 산에서 직접 캔 고사리를 선물 받았다”며 “사할린 산에는 곰이 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은 오를 엄두도 못 내는데 한국인은 고사리를 캐기 위해 산에 간다고 했다.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하기로 현지에서도 유명했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한인 남성들은 젊은 시절 탄광노역 등으로 일찍 돌아가신 탓에 지금은 여성이 많다. 진짜 열심히 산 덕에 경제적으로 안정화됐고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사할린에선 한인을 무시하지 못 한다”며 “제주여성의 강인한 정신의 결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강조했다.
심 교수는 “우리는 러시아 한인을 잊고 살았지만 그들은 우릴 잊지 않았다. 그들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인‧제주인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우리가 보답하고 지원할 때”라고 지적했다.
고 회장은 세계제주인대회에 대해 “제주에 올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여기가 바로 내 고향이구나’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며 “제주인으로서 특유의 정신을 간직하고 살며 정체성을 지키고 제주와 마카로프의 교류를 강화하는 데 평생을 바치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