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제주여성의 정신, '동토의 땅'에서 잇다
강인한 제주여성의 정신, '동토의 땅'에서 잇다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9.11.03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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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영순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시 한인회장
마카로프시의원-시립 박물관장으로 활동...'제2의 제주인'
박물관 내 한국관 조성 추진...제주두루나눔과 5년째 교류
강제 징용 속에 지켜온 한국인-제주인 정체성 수호 앞장

 

지난달 2019 세계제주인대회에 참석차 제주를 찾은 고영순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시 한인회장이 활짝 미소를 짓고 있다. 임창덕 기자
지난달 2019 세계제주인대회에 참석차 제주를 찾은 고영순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시 한인회장이 활짝 미소를 짓고 있다. 임창덕 기자

 

러시아 사할린에 사는 한인 중에 고영순씨(65)가 있다.

한국인 재외동포 2세로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시의원으로 활동하는 고씨는 제2의 제주인이다. 한 살 위였던 남편 고() 고운용씨가 제주 출신이다. 본인은 충청도 출신이다.

결혼생활에서 남편을 통해 제주인 특유의 정신을 공유했고 사별 후에도 제주를 잊지 않았다. 고씨가 지난달 12~14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9 세계제주인대회에 참석했다.

한국인제주인 정체성 수호 앞장

고씨는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시 한인회장으로 제주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 왔다.

마카로프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북쪽으로 210가량 떨어진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한인들이 강제 징용돼 탄광과 전력제지공장 등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세계제주인대회에서 만난 고 회장은 “9월 추석 때 다른 도시에 사는 제주인까지 모이면 산소에서 차례를 지낸 후 조그맣게 축제를 연다. 제주인 특유의 동네잔치가 된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2015년부터 제주탈춤극단 제주두루나눔(사단법인 한문화네트워크)과 교류를 지속해왔다. 그해 마카로프시 정부와 한인회가 공동 주최한 광복 70주년 및 러시아 승전 70주년 기념 문화축제에 제주두루나눔이 특별 초청돼 강제 징용된 한인 동포들을 위해 공연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오찬에서 보드카와 한라산소주, 연어 알과 대게, 김과 김치 등이 오갔다.

고 회장이 이끄는 마카로프시 한인회가 매년 초 제주들불축제에 참가하면 7월 마지막 토요일에 마카로프에서 열리는 우리는 함께 있다축제에 제주두루나눔이 참가해 왔다.

고 회장의 또 다른 직함은 마카로프시립 박물관 관장이다.

고 회장은 박물관에 한국 관련 전시관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고 회장이 사할린 정부에 박물관 내 한국관 조성을 지속적으로 호소한 끝에 예산을 확보하고 얼마 전 증축공사에 착공했다. 제주두루나눔도 박물관 내 한국관 조성 추진 소식을 듣고 모금활동으로 2100여만원을 모아 2017년 마카로프 방문 때 고 회장에게 전달했다.

마카로프시립 박물관 내 한국관은 380규모로 2020년 말 전후로 준공될 예정이다.

고 회장은 한국관은 강제징용관 성격이라며 강제징용 한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경상도는 물론 제주와 전국 관련 자료가 전시될 것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시는 고 회장을 통해 제주 초가와 해녀 관련 자료들을 보냈다. 고 회장은 제주들불축제를 찾았을 때 고희범 제주시장에게서 해녀 관련 자료들을 전달받았다고 소개했다.

한문화네트워크 대표인 심규호 제주국제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마카로프시립박물관 내 한국관은 세계 유일의 징용 전문 박물관이 될 전망이다.

심 교수는 일본 홋카이도에 징용 관련 작은 전시공간이 있지만 박물관으로 보기엔 무리다. 마카로프시립박물관 내 한국관이 생기면 세계 첫 징용박물관으로 점점 잊히는 징용역사를 조명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일본 정부가 강제 징용 자료들을 꽁꽁 숨겨 왔는데 과거사를 치유하고 민족 간 용서와 화해를 위해 자료를 내놔야 한다고 비판했다.

제주여성 강인한 정신 계승할 것

고 회장에 따르면 2010년 기준 마카로프에 거주하는 한인은 559명밖에 남지 않았다. 한인 동포 1세대들이 세상을 뜨고, 2세와 3세들은 대도시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고 회장은 남편도 그랬고 제주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공부도 잘 한다제주인이 따로 모여 사는 제주인구역이 있는데 최근 실거주자는 25~26명밖에 안 된다고 전했다.

고 회장은 제주 여성은 강인하다. 사할린이 엄청 추운데도 악착같이 온갖 궂은일을 해내며 가족을 부양한다제주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후세에 계승되도록 교육과 교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할린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한인이 많은데 제주방언은 금방 티가 난다. 투박하지만 정겨움이 묻어나는 방언이 제주인과 닮았다고 덧붙였다.

심규호 교수는 마카로프 방문 때 고영순 회장에게서 산에서 직접 캔 고사리를 선물 받았다사할린 산에는 곰이 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은 오를 엄두도 못 내는데 한국인은 고사리를 캐기 위해 산에 간다고 했다.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하기로 현지에서도 유명했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한인 남성들은 젊은 시절 탄광노역 등으로 일찍 돌아가신 탓에 지금은 여성이 많다. 진짜 열심히 산 덕에 경제적으로 안정화됐고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사할린에선 한인을 무시하지 못 한다제주여성의 강인한 정신의 결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강조했다.

심 교수는 우리는 러시아 한인을 잊고 살았지만 그들은 우릴 잊지 않았다. 그들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인제주인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우리가 보답하고 지원할 때라고 지적했다.

고 회장은 세계제주인대회에 대해 제주에 올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여기가 바로 내 고향이구나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제주인으로서 특유의 정신을 간직하고 살며 정체성을 지키고 제주와 마카로프의 교류를 강화하는 데 평생을 바치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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