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이 빚어내는 美…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몸짓이 빚어내는 美…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6.03.15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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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애 국립무용단 수석 무용수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제주에서 이름난 탁구선수 출신이었다. 예닐곱 살 밖에 안됐던 아이는 언젠가 서울에서 이름을 날리는 댄서가 되겠다고 꿈을 키웠다.

탁구선수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뒤늦게 딸아이의 꿈을 알게 됐고, 소녀는 당시 제주시지역에서 몇 안되는 무용학원을 아버지 손을 잡고 찾아 춤이라는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이는 지친 줄 모르고 춤을 추었지만 형편이 좋지 않던 아버지의 경제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초등학교 5학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소녀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인이 된 김호준씨이고 소녀는 국립무용단 수석 무용수 김미애씨다.

한 달에 단 하루, 연습을 쉬는 날인 14일 오후 김미애씨를 서울 광진구 능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손동작, 몸짓 하나하나에 무용수들의 마음이 담겨있어요. 관객을 속이려고 해도 다 드러나니까, 매일매일 일종의 마음 수련을 하며 연습을 하지요.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하는 직업춤꾼이잖아요.”

김미애씨(43)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춤을 춘 지 이제 20년이 더 지났다. 지난해 11월엔 프랑스 칸댄스페스티벌 개막 공연에 국립무용단이 초청받아 ‘회오리(VORTEX)’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주역이 바로 그녀였다. 한국무용단으로선 첫 초청 무대이기도 했다. 결과는 열띤 기립박수와 환호. 영화 분야의 칸영화제만큼이나 주목을 받는 세계적인 무용축제인 칸댄스페스티벌의 성공적 무대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르페브르 예술감독의 요청으로 남성 주역인 조재혁씨와 함께 그녀는 프랑스 무용 전공자와 아마추어 무용수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열 정도였다.

국립무용단이 창단된 이래 첫 외국안무가인 테로 사리넨과 함께 한 ‘회오리’는 성공적 무대였던 만큼 더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다음 날 첫 공연을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2015년 칸 공연 일주일 전에는 파리 테러로 유럽이 슬픔에 깊게 드리워져 있기도 했다.

‘회오리’ 작품에 대해 묻자 그녀는 “처음 공연을 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뒤에 생각해보니 제가 꼭 무당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늘의 어떤 기운과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삶과 죽음을 목도해 위로한다는 느낌이 있었지요. 춤, 예술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무용을 하면서 위로가 됐던 이가 누구인지 물었다. 환하게 웃던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시민회관 근처에서 아버지가 탁구장을 하셨어요. 오빠 둘이 있는데, 아버지는 3남매가 모두 탁구선수가 되길 바라셨지요. 아침에 3남매를 일찍 깨우고 운동을 시키셨어요. 탁구장 청소도 시키셨고, 탁구자세를 가르쳐 주시기도 했고, 덕분에 춤을 추는 기초 체력을 다지게 됐지요.”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집안 살림만 하던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육지로 떠났고 살림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됐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녀는 ‘혹여 자신의 처지를 친구들이 알까’ 외려 자신감 있고 당당한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중학생 여자아이가 오빠 도시락을 챙겨야 했어요. 저녁반찬이 운 좋으면 돼지고기에 김치를 넣어만든 찌개였지요. 정말 먹고 싶은 게 많기도 했어요. 그러다보니 집 근처 가게에서 외상으로 이것저것 먹었는데, 나중에 그 외상값이 정말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됐지요. 엄마한테 들켜서 정말 크게 혼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런데 그때도 계속 무용을 했어요. 아버지 지인의 도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용학원에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다녔지요. 무용연습 끝나면 미안해서 학원 청소도 했던 기억도 있고요.”

힘든 상황에 어떻게 무용을 계속했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냥, 춤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사춘기 기억이 없어요. 하루는 별이 유난히 반짝이던 밤이었는데, 옥상에서 미친 듯이 춤연습을 했어요. 온몸에 땀이 흥건했는데, 그 별들이 나를 향해 막 쏟아진다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지치지도 않았고, 그렇게 춤추는 게 좋았어요”라고 신기한 경험을 전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제주도립예술단에서 2년 정도 몸담았던 그녀는 뒤늦게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다. 4년간의 대학생활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장학금을 받기 위한 ‘악바리’처럼 살았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제가 해녀춤에 대해 발표를 했을 때인데, 제주도에도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불쌍한 섬처녀가 정말 애쓴다는 시선 같은거 말이죠”라고 당시를 이야기했다.

졸업 후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그녀는 현재의 국립무용단과 함께 당시 국내 최고로 인정받는 2곳의 무용단에도 합격하는 행운을 안았다.

“레슨을 따로 받지도 못했고 경제적 상황 때문에 무조건 한 곳이라도 합격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뿐이었어요. 그렇게 행복한 선택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땐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마음껏, 걱정없이 춤을 출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에 그녀가 느끼는 행복이 그대로 묻어났다.

단원들 사이에서 시기나 질투는 없었느냐는 질문에 “제가 좀 무딘 게 장점”이라며 웃던 그녀가 양성옥 교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보다 훨씬 오래전 국립무용단 무용수로 이름을 알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춤 연구와 후학들을 지도하는 양 교수는 제주 출신인 걸출한 춤꾼이다.

그녀는 “아직도 감히 마주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분인데도 늘 겸손하고 배울 게 많은 선생님이시죠. 저도 후배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주변에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도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분이지요”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계획, 그런 거 없이 정말 지금 이 시간을 즐겁고 열심히 사는 거, 그걸로 만족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 ‘현재’로부터 전화가 왔다. ‘현재’는 그의 아들 이름이다. 그녀는 ‘현재’를 사랑하고 즐기고 있다.

김미애 프로필

제주시 남문통 근처에서 자랐다. 1972년생으로 제주남초등학교와 신성여중·고를 졸업, 제주도립예술단원으로 활동하다 한성대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로 활약하고 있으며 지난해 프랑스 칸댄스페스티벌 개막작에 한국무용단으론 처음 초청돼 주목을 받은 ‘회오리’의 주역이었다.

동양인으로선 처음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의 정식단원으로 주목을 받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있는 김용걸이 그녀의 배우자로 무용계에선 스타부부로 통한다.

<서울=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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