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에 젖는다
메밀꽃에 젖는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10.0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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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학창시절,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달밤에 소금을 뿌려 놓은 메밀꽃 핀 들녘을 한 번쯤은 꼭 가보리라 다짐했던 적이 있다. 제주에도 많이 재배하는 메밀이지만 소설 속의 무대였던 그곳 봉평장에 가면 허 생원과 동이를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축제가 끝난 뒤의 평창은 어디든 고요했다. 평창역에 내리는 이도 우리 일행뿐이다.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메밀꽃은 며칠 전에 지나간 태풍 영향으로 늘 그려왔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골목길마다 아직 지지 않은 꽃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코스모스, 과꽃, 백일홍, 만수국, 맨드라미. “꽃은 무슨 꽃이든 간에 꽃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이효석의 생각이 오롯이 깃들어 있는 마을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나의 눈에는 모든 게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제 제주에서는 어쩌다가 볼 수 있는 꽃이어서인지 이름이 가물가물해서 같이 간 일행에게 맞는지 확인해 본다. 그리고 옥수수밭은 아직 추수 전이어서 제주도와 강원도의 기온차를 엿보게 했다. 예전 우리가 보면서 자라왔던 시골 정경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봉평에서의 저녁상은 메밀이 주인공이었다.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묵사발.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꿩 메밀국수가 생각났다.

온 가족이 모이는 설날, 오랜만에 얼굴 보는 딸과 사위를 위해 어머니는 어렵게 꿩을 구해 놓으셨다. 밀가루와 달리 끈기가 없는 메밀가루를 열심히 치대어 내어놓던 꿩 메밀국수가 그리워졌다.

반죽도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것을, 다른 먹거리도 많은 명절날 꼭 해야겠냐며 투덜대던 음식이다.

늙어버린 어머니는 이제 힘에 버거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할 엄두를 못 내신다.

강원도 평창까지 와서 어머니의 음식이 그리워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뒤늦게나마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내년 설에는 명절 음식에 질린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꿩 메밀국수나 맛있게 만들어봐야겠다. 물론 어머니를 스승으로 모셔 놓고 할 일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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