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00년 향한 또 한 걸음...'정론의 길'을 걸어갑니다
[창간]100년 향한 또 한 걸음...'정론의 길'을 걸어갑니다
  • 부남철 기자
  • 승인 2019.09.30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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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현충 기자 lhc@jejuilbo.net

1945년 대한민국 광복과 함께 도민들의 자주적 의지에 의해 창간된 제주일보가 1일로 창간 74주년을 맞았다.
제주일보는 1945년 광복의 흥분과 감격 속에서 언론 활동을 통해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도민의 열정을 바탕으로 전국 지방지 가운데 최초로 창간됐다. 제주일보는 수 많은 언론이 생멸(生滅)하는 속에서도 전국 신문 가운데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이어 세 번째의 연륜을 이어오고 있다.
제주일보는 그동안 갖은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도민과 애환을 같이하며 격동의 제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해 왔다.
74년이라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부침의 순간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 묵묵히 제주일보를 사랑해 준 도민과 독자들의 성원을 밑바탕 삼아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독자와 도민과 함께 맞이 할 100년을 바라보며 제주일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본다.

▲광복 그리고 전국 지방지 및 제주 최초 언론 제주일보(전신 濟州新報) 탄생
1945년 대한민국 광복은 제주 도민들에게 환희를 가져왔으며 도민 사회에서는 자주적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특히 자주적인 언론활동을 통해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청년들의 열정에 의해 제주인의 첫 자주적 매체인 제주신보(濟州新報)가 창간됐다.
제주 역사 상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주신보는 미군이 제주에 상륙한 후 사흘만인 1945년 10월 1일 창간됐다. 제주신보는 창간 당시 제주민보(濟州民報)라는 제호로 발행했는데 이는 그 해 7월부터 9월 25일까지 발간됐던 일본군의 진중신문 제호가 ‘제주신보’였기 때문이다.
창간 멤버는 김용수ㆍ이기형ㆍ문종욱ㆍ고광태ㆍ박광훈ㆍ박대전 등이었다.
제주신보는 광복된 조국에 이바지한다는 일념에 발행인 등 경영체제도 갖추지 못 한 채 출발했지만 신문 발행에 대한 열정만은 대단했다. 창간 멤버들은 일제 말기 한글 말살정책으로 땅 속에  폐기처분됐던 한글 활자를 파내 하나하나 정성껏 씻은 후 300부 정도의 창간호를 발행했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5호 활자로 단면 인쇄했는데 당시 관덕정 광장에 열렸던 오일장에서 배포됐으며 창간호를 받아든 도민들은 비로소 조국의 광복을 실감했다.
창간호에는 미군 진주, 제주 주둔 미국 사령관과 일본군 작전참모의 회견을 통해 도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장책과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철수 일자 등에 관한 기사가 주요 기사로 다뤄졌다.
또 한국인 강제연행자 550명을 태운 수송선 부도환(浮島丸)이 일본 항구에서 의문의 폭발로 침몰해 탑승객 전원이 희생된 사건이 알려졌는데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라는 설이 있어 특별히 취급됐다.

▲도민과 함께 한 74년의 기록
광복 후에도 제주에 남아있던 일본군 헌병대가 창간호에 게재된 ‘부도환 기사’내용에 불만을 품고 창간 주역인 김용수를 강제 연행해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용수는 다음 날 새벽 석방됐지만 이처럼 출발부터 필화사건을 겪은 제주신보의 앞길에는 제주 현대사의 역경이 함께 놓여 있었다.
제주4ㆍ3 사건 때는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됐듯이 제주신보 역시 고난을 피하지 못 했다. 2대 편집국장인 김호진이 재판도 없이 총살을 당했는가 하면 서북청년단에게 신문을 강제로 빼앗기기도 했다. 제주신보의 경영권은 1949년 10월 12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1950년 3월쯤 사주에게 돌아왔지만 서북청년단이 신문사를 장악했던 1년 동안 창간호 등 그 때까지 발행했던 신문 모두가 사라지면서 제주 언론 역사는 공백기로 남게 됐다.
6ㆍ25 전쟁 중에는 제주계엄사가 불법으로 신문을 접수하기도 했다. 또한 여러 수난과 역경 속에 신문을 발행하지 못 하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끝내 다시 일어서 역사의 기록자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5ㆍ16군사쿠데타 이후인 1960~70년대에는 당시 제주신보와 제민일보가 통합해 제호를 제주신문으로 변경하고 제주 대표 언론으로서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쏟았던 제주도민의 땀과 눈물을 생생하게 지면에 담아왔다.
1980~90년대에는 한 때 권위주의 정권에 영합하며 언론의 정도를 이탈하기도 했지만 권력의 서슬퍼런 보도지침 속에서도 민주화 현장을 지키려 애쓰며 제주지역공동체의 번영과 발전 과정에 함께 해왔다. 1996년 11월 1일부터는 한글 제호인 ‘제주일보’ 시대를 열어 한글세대와 소통하고 기존 세로쓰기에서 전면 가로쓰기 편집으로 전환하는 등 대한민국 언론 역사에 길이 남을 혁신을 주도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까지 제주일보는 폐업사태, IMF 환란의 파고와 후유증으로 인한 부도사태, 제호 경매 및 두 개의 제주일보 발행 등 파란을 겪기도 했지만 제주 최고의 연륜과 자긍심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 제주 대표 언론의 길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도민과 제주 발전을 위해
제주일보는 창간 이후 도민들과 함께 하며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도 수행했다. 6ㆍ25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3년 2월 제주일보는 식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도민들을 위해 의연금품 모집운동을 전개했다. 1966년 퇴비ㆍ고구마 2개 부문의 증산왕 선발을 시작으로 척박한 제주의 향토산업 발전과 문화ㆍ교육ㆍ체육 진흥 등을 위한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3월 학생문예’를 비롯해 ‘바둑 제주도 왕위전’, ‘백호기쟁탈 전도 초ㆍ중ㆍ고교대항 축구대회’, ‘모자사생대회’, ‘도일주 역전 마라톤대회’, ‘제주도미술전람회’, ‘제주원호대상’, ‘제주어린이명예기자제’, ‘제주도 4H대상’, ‘제주시조지상 백일장’ 등은 그동안 도민과 지역사회를 위한 제주일보의 노력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제주 학생토론왕선발대회’, ‘제주일보기 배드민턴대회’, ‘제주-중국 청소년 축구교류전’ 등을 개최하며 도내 청소년들의 꿈을 키워주는데 앞장 서고 있다.
제주신문사 시절이던 1973년 북신로 사옥을 마련하면서 제정한 이래 제주일보의 사시(社是)는 ‘正論直筆(정론직필), 民權守護(민권수호), 誠實奉仕(성실봉사)’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 주장을 펴고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전하며 진실을 추구하겠다는 의 이자, 도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제주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언론의 사회적 소명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또한 매일 아침 도민과 독자들을 만나는 신문을 만드는 데 정성을 다하겠다는 약속이다. 제주일보는 언론 본연의 사명인 정론에 충실하면서 도민들의 권익을 지키고 제주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독자와 도민과 함께 창간 100년을 준비할 것이다.

부남철 기자  bunc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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