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반하다
은행에 반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9.2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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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희 수필가

담근 지 3년 된 과일주 뚜껑을 땄다.

은행열매 술이다. 감미로운 향기가 코끝으로 달려든다. 색깔도 그윽한 금빛이다. 꼬릿꼬릿한 냄새를 풍기던 과육이 발효되며 이런 향기를 내뿜다니, 신비하다. 술 거르는 걸 도와주던 남편도 코냑 향이 난다며 맛부터 보자고 잔을 들이댄다.

색깔과 향 못지 않게 맛 또한 일품이다. 혀끝에 감도는 향긋함이 목을 넘기며 알싸하다. 에틸알코올에 취한 황금빛 액체가 굽 높은 잔 안에서 뱅그르르 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밟으며 좋아하지만 떨어진 열매를 보면 진저리를 친다. 사실 잘 익은 은행 열매일수록 고리탑탑한 냄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때쯤,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열매 때문에 지자체에 민원이 들끓어 골머리를 앓는다는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은행이 익을 때를 손꼽아 기다린다.

동네에 있는 학교 교정과 공원의 은행나무가 내게 열매를 아낌없이 내려주는 곳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은행 열매를 주워 왔다.

일 년 양식을 마련한 것 같이 흐뭇하다. 연년이 열매를 베푸는 은행나무가 예뻐서 오가며 눈인사를 할 때도 있다.

은행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한 과실이다.

효능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항암효과.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여 체내의 활성산소를 억제하며 기관지 계통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다.

징코 플라톤이라는 독특한 물질은 혈전 분해 성분이라 혈액순환을 도와 혈액의 노화도 막는다. 은행잎은 해충 등이 근접 못하게 하는 효과까지 있으니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비타민 CA, B1, B2 등의 함량도 높아 면역력을 증진시키고 뇌세포 대사를 활성화시켜 기억력을 증진하고 건망증을 해소시키며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알려진다. 애용할 가치가 있는 열매임이 분명하다.

은행 열매 냄새 때문에 피해 다니며 행정에 민원 올리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서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란 문구가 떠올려지는 이로운 나무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약 2억년가량 존재하고 있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릴만한 생물이다. 중생대 쥐라기 때 가장 번성했으니 공룡들과 함께 지구에 군림했던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아등바등 억척을 떨어도 한 세기를 못 사는 우리는 우주 안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대낮, 은행 주 한잔에 홀렸나. 영생의 길로 가는 비밀의 열쇠가 은행 알, 고약한 냄새에 숨겨 있을 거라는 엉뚱한 발상을 해본다.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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