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9-16 04:00 (월)
한글 씨줄로 제주전통 날줄로 한글서예 직조
한글 씨줄로 제주전통 날줄로 한글서예 직조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9.09.10 18: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한글서예의 대가 한곬 현병찬 선생
국전 대상 수상 후 파도체-미소체 등 독자적 서체 구사
고향 향한 애정이 원동력...필묵으로 '제주 알리기' 감동

붓이 화선지를 타니 먹물이 오묘하게 번져나간다. 하얀 여백에 검은 파도가 넘실댄다. 때론 붓이 지난 길을 따라 경쾌한 미소가 흐른다. 묵향 짙은 필획마다 생동감이 꿈틀거린다.

필묵의 변주자는 한글서예의 대가로 꼽히는 한곬 현병찬 선생(80). 어느덧 반세기하고도 강산이 한 차례 변하고도 남을 시간만큼 서도에 정진해온 한곬의 손은 붓과 혼연일체다.

그가 붓을 들고 줄곧 응시해온 지점은 제주의 원형이다. 고향을 향한 애정이 대찬 서예인생의 원동력이다.

한글서예 정상파도체미소체 구사하다

한곬은 제주시 화북 출생으로 제주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단에 몸담았다.

서예는 사범학교 시절이던 1957년 소암 현중화 선생을 사사하며 입문했다. 1980년부턴 해정 박태준 선생을 사사했다. 두 스승은 모두 한문서예의 대가지만 한곬은 한글서예로 방향을 틀어 획 하나, 점 하나가 살아있는 글, 꿈틀거리는 글을 쓰는 데 정진했다.

서도의 심전경작(心田耕作)에 몰입한 끝에 한곬은 1992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한문서예가 주류인 서단에서 한글서예로 정상에 서며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곬은 참신하고 차별적인 서체 연구에 몰입했고 독창적인 파도체를 구현했다. 한글 판본체에 파도의 운동성을 투사해 다이내믹한 볼륨감을 자랑하는 그만의 특화된 서체다. 세련된 균형미와 묵직한 남성미가 보는 이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미소체도 한곬의 트레이드마크다. 2001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현대 한국대표서예가 선정으로 한곬이 컴퓨터 글꼴인 폰트로 개발해 보급한 서체다. 당시 유명했던 일중 김충현 선생의 판본체와 차별화하기 위해 한곬이 가로획의 중간부를 아래로 볼록하게 내리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탄생했다. 마치 미소를 짓는 입모양이 연상되며 중후함보다 경쾌함이 돋보인다.

한곬의 한글서예작품 2점은 2017년과 2018년 고등학교 미술(이론)교과서 2종에 수록됐다.

한글과 제주전통의 콜라보후진 양성 매진

한곬은 한글을 씨줄로 제주전통문화를 날줄로 삼아 서예작품을 직조해왔다. 아호 그대로 외골수의 집념으로 붓과 동고동락해왔다.

2003년 교단에서 퇴임한 한곬은 한경면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입주했다. 작업실이자 거주지에는 먹글이 있는 집이란 택호를 걸고 붓장난에 몰입하며 마을 터줏대감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제주 특유의 민요와 노동요, 속담, 방언이 그의 작품을 관통한다. 고향을 향한 애정이 창작열의 근간으로 제주의 뿌리와 도민의 정신이 한글 서예대가의 붓으로 형상화돼왔다.

그의 서예인생의 한 축은 후진 양성으로 제주를 향한 애정과 맞물려 있다.

한곬은 1992년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전신 한곬한글서회)을 창립한 후 제자들과 함께 한글과 제주방언(제주어)으로 서예를 쓰고 국내 전시는 물론 국제전을 열어 널리 알려왔다.

특히 한곬은 2008년 제주알리기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제주어로 서예작품을 쓰고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전시를 개최했고 학술연구와 교류전도 지속적으로 마련했다. 10년이 지났지만 한글서예를 통한 제주 알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 제주의 한글서예작품들이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특설전시장에 전시됐다.

이 과정에 제자들도 급성장해 서예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1명은 스승의 뒤를 이어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는가 하면 국전 초대작가로 입성한 제자만 8명에 이른다.

제주도민 정신의 요체는 불굴의 의지

최근 먹글이 있는 집에서 만난 한곬은 고향 제주를 향한 애정을 쏟아냈다.

제주정신의 요체는 불굴의 의지로 선조들이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포기는 곧 죽음이었기에 자연스레 체화된 후 세대를 초월해 유전된 제주인 특유의 기질이란 설명이다.

한곬은 제주방언으로 요망지다란 단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제주노동요를 한글서예로 즐겨 쓰는 한곬은 제주말씨에 도민 특유의 공동체정신이 스며있다그 중에도 서민들의 삶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노동요에 제주정신의 핵심이 깃들어있다. 그것은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한곬은 도민 특유의 성격으로 회자되는 배타성에 대해서도 결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배타적이요?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지역민의 공통기질에는 다 이유가 있죠. 역사적으로 외부 침략이 잦으니 경계심이 많은 것뿐입니다. 삼다도 중 여다(女多)도 외부 침략으로 남성이 줄었기 때문 아닙니까.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고 그게 기질이 됐습니다. 요망진 거죠. 고난과 핍박을 견디고 극복하는 정신은 세계 어디 내놔도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팔순에 이른 한곬은 조만간 제주도에 먹글이 있는 집을 무상 기증할 계획이다.

먹글이 있는 집이 들어선 부동산은 물론 자신의 작품 300점과 수집 작품 100여 점, 문하생 작품 50여 점 등 서예작품 450여 점 작품, 서예전문도서와 서화도록이 기증될 예정이다.

서예는 70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입니다. 욕심은 없죠. 그러나 제주어를 지키고 제주인 정신을 알리는 것은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여생도 한글과 제주어를 지키는 데 바칠 겁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