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고마움
계절의 고마움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8.27 18: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순신 수필가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계절을 불러오고 자연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사람 또한 시간과 함께 점점 채워지고 비워지기도 한다. 조물주의 섭리아래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며 돌아가는 세상은 참 오묘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카톡에는 저는 한국을 떠납니다. 라는 폭염의 송별사가 떠돌아다니고 가을을 환영하는 인사도 있다. 계절을 만나고 헤어지며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더구나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살고 있으니 더 좋다. 새로 만나는 계절은 뒤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는데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떠나는 여름에게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찜통더위를 늦게 몰고 와서 고맙고, 짧게 머물러서 고맙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해줘서 고맙다. 열심히 일한 여름 이제는 떠나도 좋다. 더위를 감내하며 제 몫의 일을 해낸 모든 분들도 스스로 격려할 일이다. 여름 고비를 잘 넘기면 그 해 가을은 풍성해지고 겨울은 여유로워진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름에 일하고 가을에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겨울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인생이다.

올 여름은 텃밭 채소들이 잘 자라 저마다 제 몫을 해주니 고맙다. 고추와 가지, 깻잎, 상추 등이 싱싱함을 품고 식탁 위에 올려 질 때마다 행복했다. 노란 호박꽃이 벌 나비를 불러 모으더니 꼬맹이 호박을 여기저기 숨겨 놓았다. 한가위 보름 달만큼 알찬 호박을 기대한다. 늙은 호박으로 키워서 겨울에 노란 호박죽 밥상을 상상해 본다. 호박잎쌈과 호박잎 국 또한 별미다. 허리가 부러져 비틀거리면서도 살아남은 토마토 한 그루가 주먹만한 토마토 하나를 남겨서 나를 감동시켰다. 성치 않은 몸으로 얼마나 힘들게 키워냈을까 싶다.

뭐니 뭐니 해도 올여름 가장 고마운 것은 늙은 포도나무 한 그루다. 알맹이가 크지는 않아도 대롱대롱 많은 송이가 달렸다. 따 보니 광주리로 두 개 정도나 된다. 한 광주리는 이웃에 나누어 드리고, 나머지는 잼을 만들었다. 알알이 씻은 다음 끓여서 씨와 껍질을 채로 걸러냈다. 스테인리스 냄비에 넣고 약간의 설탕을 첨가하여 계속 저어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니 팔이 아파온다. 몇 해 전 블루베리를 손수 따서 잼을 만들어 나누어 준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도 몇 시간 동안 팔이 아프게 저으면서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더하다. 두 시간 쯤 저어주다 보니 수분은 날아가고 걸쭉해 지면서 잼으로 재탄생 될 조짐이 보였다. 조금 만 더 하면 완벽할 거 같았는데, 아뿔싸, 너무 졸였다. 시간은 때론 이처럼 냉정하다. 골든타임을 넘겼지만 그런대로 유기농 수제 포도잼이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몇 곳으로 보내졌다. 올 여름은 풍성한 수확을 안겨준 채소와 포도 덕분에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여름에게 잘 보내주고, 이제 먼 길 돌아 다시 온 가을을 반갑게 맞이한다. 가을은 여름이 남긴 일들을 이어받아 결실로 이끄는 성숙한 계절이다. 가을처럼 내 삶도 성숙으로 채우고 싶은데 아직도 설익은 과일 같은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가을 조금 더 성숙할 수 있도록 깊은 상념의 터널을 걸어 볼 참이다. 그 때 어디에선가 작은 내 모습을 보고 너는 잘 살고 있어. 점점 익어가는 네 모습이 보기 좋아.’라고 격려하는 긴 그림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떠나간 여름만큼이나 이 가을에게도 감사하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