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생애사
어머니의 생애사
  • 제주일보
  • 승인 2019.08.2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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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

가난해서,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애기들 굶길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지.”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이 말을 무한 반복하신다.

얼마나 고된 인생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다섯 명이나 되었고 젖먹이 시동생까지 떠맡았다.

집도 땅도 없이 맨몸뚱이를 재산 삼아 살아 온 생애가 절절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아이들 학교를 제대로 못 보낸 일이지만 고맙게도 아이들은 모두 잘 자라 주었다고 수줍게 웃으신다.

할머니는 다 늙은 사람의 살아 온 말을 들어줘서 부끄럽지만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하신다.

노년의 어머니들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듣다보면 거의 비슷비슷하다.

가난해서, 여자라서 못 배운 한이 깊다. 그 한을 대물림하기 싫어 자식들만은 잘 가르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가난한 형편에 남편들은 왜 하나같이 바람을 피우고 두 집 살림을 하는지 그 한까지 보태지기 마련이다.

그나마 시부모의 구박이나 겹치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모두들 험난한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이겨내서 지금에 이르렀다. 듣다보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고 장엄한 한 생애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지난 시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성애다.

돈을 벌 수 있다는 풍문에 솔깃해서 밀항선을 탔다가 말도 안 통하는 타국의 수용소 생활을 감내한 것도 다 모성애 때문이었다.

작은 움막이라도 얻기 위해 사람보다 말, 소가 더 많은 동네라도 마다않고 들어간 것도 다 모성애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서툴게나마 살아온 내력을 글로 써보기도 하고 몇 줄짜리 시로 써보기도 하고 그림을 덧붙이기도 하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더러 책으로도 엮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도 한다. 한 사람의 생애사가 역사의 작은 단위라는 사회적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구체적이고 덧칠되지 않은 인생사가 오히려 감동을 주고 삶이란 무엇인지 깊은 성찰에 빠지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식들이다.

어떤 자식들은 어머니의 생애사가 알려지는 데 질색을 한다. 떠올리기 싫은 가난한 과거가, 불행하고 고단했던 과거가 무슨 자랑거리냐는 이유에서다.

얼마나 잘 살았다고, 특별히 한 게 뭐가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늙고 힘없는 어머니들은 성공한 자식들에게 자신의 누추한 과거가 창피할 수도 있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이 가장 싫은 어머니들은 결국 침묵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의 인생이 칭찬받을 일만 있고, 부끄러운 일만 있을까. 가난하고 험난한 과거라는 이유로 드러내면 안 되고 잊혀져야 하는 인생이 있을까. 평생 그렇게 살아온 이유인 자식들에게 부정당한다면 그 한평생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독 노인들의 생애사가 주목받는 요즘, 생각이 더 많아지는 이유이다.

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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