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적 탐험가, 제주자연의 가치에 숨결 불어넣다
선구적 탐험가, 제주자연의 가치에 숨결 불어넣다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9.08.05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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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산 부종휴
만장굴.빌레못굴 잇따라 발견
태고의 신비, 천연기념물 지정
제자들과 함께 탐사, 의미 각별
미기록종 식물 300종 이상 보고
벚나무 자생지도 최초로 밝혀내
유네스코 3관왕 타이틀 기반 닦아
① 1970년대 초반 빌레못동굴 조사에 나선 부종휴 선생(오른쪽)과 장남 명제씨가 동굴 안에서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② 동굴 탐사 도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부종휴 선생(왼쪽 두 번째). ③ 1972년 한림 쌍용굴과 협재굴의 바닷가쪽 입구 발견 후 부종휴 선생이 부인 이정희씨와 밝게 웃고 있다.
<출처=부종휴 선생 사진집 ‘한산 그리고 제주’>

한산(漢山) 부종휴(1926~1980)는 일찍이 제주자연의 가치를 설파한 선각자다.

누구나 제주환경의 척박함을 논할 때 그는 제주자연의 숨은 차별성과 경쟁력을 발굴했다.

부종휴는 탐험가로서 천연기념물인 만장굴과 빌레못굴을 발견했고 학자로서 제주자생식물을 중심으로 자연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산악과 사진, 자연보호운동도 그의 생을 관통했다.

오늘날 제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유한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 3관왕(세계자연유산생물권보전지역지질공원) 타이틀 획득의 출발점도 그의 선구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최장 동굴 세상 밖으로

1946년 김녕초 교사였던 부종휴는 제자 30여 명으로 꼬마탐험대를 꾸려 동굴탐사에 나섰다.

그해 102일 최종 지하탐사에서 동굴 종점인 만쟁이검멀이 발견됐다. 탐사 1년만인 1947220일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는 만쟁이검멀의 지상부와 지하 굴이 동일체임을 확인했다. 암흑 속 미지의 공간으로 주민들에게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던 만쟁이검멀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당시 드러난 만장굴은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는 나흘 뒤인 24일 학교 운동장에서 만장굴(萬丈窟) 명명식을 갖고 만장굴 만세를 외쳤다.

만장굴 탐사는 국내 공식적인 동굴조사가 1958년 경북 울진 성류굴로 기록된 점만 봐도 일대 사건이자 파격이었다. 1962년 만장굴은 김녕사굴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됐다.

만장굴은 서막에 불과했다.

부종휴는 1970년 성산읍 수산굴과 1971년 서귀포 미악 동쪽 수직굴 등을 답사했다.

그러다 1971년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 또 한 번 벌어졌다. 옛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에서 길이 11.7에 달하는 당시로선 세계 최장의 동굴이 부종휴와 한라산우회에 의해 발견됐다. 빌레못굴이었다.

2년 뒤인 1973년 부종휴와 박행신 제주대 교수 등은 빌레못굴 안에서 구석기시대 유물과 동물뼈 화석을 발견했다. 중앙문화재위원들이 긴급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1975년에는 정영화 영남대 교수 등에 의해 빌레못굴의 구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종합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빌레못굴은 1984년 천연기념물 제342호로 지정됐다.

진정 제주를 사랑한 부종휴는 동굴 탐사과정의 실수도 소중한 기록으로 후대에 남겼다. 탐사환경이 열악했고 누구도 걷지 않은 선구적 탐험의 길을 걸었기에 실수는 어쩌면 불가피했다.

빌레못굴을 탐사할 당시 황곰의 두개골을 굴 밖으로 갖고 나와 촬영하고 고생물학 전공자에게 의뢰하려고 하던 중에 큰 실수를 범했다. 두개골을 밖으로 꺼내오기 전 약품 처리해야 뼈가 굳어지는데 그걸 몰라 햇빛 아래서 사진을 찍고 옮기려는 순간 뼈가 부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부종휴가 1973교육제주’ 24호에 발표한 한국 신구석기시대의 혈거유적에 대하여-제주도 빌레못굴한들굴의 일부다.

식물의 보고, 제주발견하고 알려

1960년대 부종휴가 제주시 아라동과 조천읍 교래리의 경계에 있는 흙붉은오름 등성마루에서 흰진달래 자생목을 발견했다. 당시 한라산에는 흰진달래가 자라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부종휴는 순간 이건 미기록종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부종휴는 식물분야에서 더욱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식물학자로서 한라산 정상만 360회 이상 등정하며 미기록종 식물을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다. 그가 새로운 식물 300여 종을 찾아냄으로써 한라산은 기존 1400여 종에서 오늘날 1800여 종이 자생하는 식물의 보고로 자리매김했다.

부종휴는 1963년 제주도지 제12호에서 한라산은 식물 수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의 어느 산보다 많은 1800종에 달한다. 난대와 온대, 한대가 분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19624월 부종휴는 제주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했다. 당시 국립과학원장이던 박만규 박사가 56명이란 대규모의 제주도식물조사단을 이끌고 단장 자격으로 제주에 왔다.

한라산을 손금 보듯 꿰던 부종휴도 조사에 참가했고, 수악 서남쪽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찾았다. 제주시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도 그때 확인됐다. 20세기 초부터 일본과 한국 식물학계가 벌인 왕벚나무 원산지 논란에 쐐기를 박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한림읍 월령리의 선인장 자생지도 부종휴가 세상에 알린 곳이다.

19798월 부종휴는 제주도지 75호에 나의 산행, 아름다운 경관식물의 보고-한라산 등산 365란 글을 투고하고 산을 다니면서 식물을 채집한 결과 새로운 미기록 식물 400여 종을 추가해 한라산 식물의 종수가 1800종에 이른 것은 나의 큰 자랑이라고 썼다.

한라산이 곧 삶이었던 제주인

한라산이 곧 제주라면 부종휴의 삶은 한라산 자체였다. 그의 호 한산(漢山)은 한라산과 큰 산을 뜻한다. 생전 부종휴는 한라산은 정말 매력적인 산이다. 가도 가도 싫증을 느낄 수 없다. 한라산에서만 느끼는 묘미와 스릴, 아름다움, 그리고 풍부한 식물자원과 관광자원은 다른 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되뇌곤 했다. 한라산은 그의 각별한 제주사랑의 원동력이었다.

부종휴는 산악인으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1964년 제주산악회 부회장을 거쳐 1968년 한라산우회 회장에 취임했다. 한라산 등산로 표지판 설치와 새로운 등반코스 개척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부종휴는 한라산 곳곳을 누비며 10개 등반코스를 개척하고 산악운동에 불씨를 지폈다. 그의 현장조사는 훗날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인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한라산 어리목 탐방로를 타고 정상에 오르는 서북벽 코스는 한라산을 자주 다녔던 산악인들에 의해 개척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에 부종휴와 김종철 등이 징과 망치를 이용해 서북벽 조면암 바위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홈을 파 계단을 만들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한다.

삶이 탐사와 관찰, 기록의 연속이던 부종휴는 사진의 중요성도 간파했다.

장남 부명제씨에 따르면 부종휴는 한꺼번에 카메라를 7~8대씩 갖고 다녔다. 지금처럼 다양한 기능과 성능을 갖춘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던 탓에 상황기능별로 골라 쓰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 부종휴는 고영일과 1955년 제주시 칠성로 남궁다방에서 2인 공동사진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제주 최초의 사진전으로 기록돼 있다.

부종휴의 제자인 문기선 전 제주대 교수는 선생은 기인이자 수재, 교육자, 식물학자, 음악가, 동굴탐험가, 사진작가, 산악인으로 걸출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비치미오름에는 부종휴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숨결과 족적이 남은 제주의 산야 중 한 곳이다. ‘산과 브람스와 커피, 파이프와 한라산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분.’ 묘비명이다.

한편 고인이 세상을 떠난 후 25년이 흐른 2015년 한산부종휴선생기념사업회가 결성돼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제주도는 2016년 만장굴 입구에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를 기념하는 기념조형물을 세웠다. 부종휴가 꼬마탐험대를 이끌고 동굴을 탐험하는 과정이 형상화됐다.

제주도는 올해 안에 만장굴과 한라산 일대에 부종휴 길도 조성할 예정이다.

 

 

부종휴는

1926년 구좌읍 세화리 출생으로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김녕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제주농업학교, 신성여고, 제주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1953년 부산대 약학대학 조교를 거쳐 1960년과 1966, 1967년에는 각각 서울대 생약연구소 연구원과 서울대 약학대학 약용식물학교실 연구원, 서울대 의과대학 생화학교실 연구원으로 부임했다. 1976년부터 제주대 식물학과 강사도 역임했다.

1973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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