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광해의 비'가 내릴까
내일은 '광해의 비'가 내릴까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9.08.0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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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우리) 임금 관하신 날(돌아가신 날), 가물당도 비 오람서라, 이여~ 이여~” 제주도 민요 ‘광해우(光海雨)’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후금(後金)과의 전쟁(병자호란)와중에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유배됐고, 4년 후인 1641년 음력 7월 1일 제주시에서 숨진다. 그 날.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가 내렸다.  이후 음력 7월 1일이 되면 제주도에 비가 내렸다는 것이 광해왕의 한이 서린 비, ‘광해우’의 유래다.
제주지방기상청이 이 ‘광해우’에 대한 기상관측자료를 분석해 내놓았다.
기상청이 분석한 결과 제주도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1923년부터 지난해까지 음력 7월 1일에 비가 내린 해는 96년 중 57년(60%)이었다.
음력 7월 1일에 비가 오는 날이 실제로 많았다는 얘기다.

▲광해군은 공과(功過)가 엇갈린다.
하지만 제주 백성들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전승되는 민요만 보아도 그렇다. 광해군은 자신이 왕위에서 쫓겨난 것보다 (전쟁으로) 백성이 고통을 받는 것을 한스러워했다고 한다. 광해는 왕위에 있을 때 만주에서 일어난 누르하치의 후금(훗날 청나라)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실리 외교를 폈다. 명-금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빠졌다. 하지만 정변이 일어나고 광해군은 쫓겨났다. 그리고 외교는 명나라를 사대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親明排金)으로 바뀌었다. 이에 금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나라는 풍비박산이 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광해군이 제주에 유배됐을 때다.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매몰돼 있던 당시 서인(西人) 세력은 광해군을 내쫓는 인조반정에 성공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금나라의 공격으로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는 국가실패를 초래했다. 역사가들은 지도자로서 광해군을 재평가하고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기록한다.
또 한 명의 지도자가 있다. 993년 거란이 침략해 왔다. 고려의 대장군 서희는 거란의 여진 공격을 돕겠다는 미끼를 적장 소손녕에게 던졌다. 거란은 물러나면서 당시 여진의 땅이었던 의주에서 철산, 선천 등 평북지역 강동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한다. 이 서희의 외교술은 지금까지 실리외교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서희는 거란과 협공해 여진을 몰아내고, 즉시 강동6주를 차지하고 성을 쌓아 거란의 침공에 대비했다. 실리란 냉정하고 수단에 명분과 자존심 따위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마침내 일본과 경제 전쟁이 시작됐다. 대인(對人) 관계나 여야(與野) 관계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나라와 나라 사이 대외(對外) 관계에 있어 싸움과 전쟁은 최하책(最下策)이다.
결국 양국의 국민만 피 흘리게 된다.
이왕 전쟁을 시작한 마당에 단호하게 맞서야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광해군의 판단과 서희의 지모가 필요하다.
명분보다 냉정한 실리로 외교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대내적으로는 기업활동에 힘을 실어주는 친(親) 기업 정책을 앞세우고 예상되는 경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연구개발과 세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정치도 이럴 때는 여·야가 따로 없다.
적전분열(敵前分裂)의 대가는 패망이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야당이 정부에 협력해야 하지만 정부가 먼저 할 일이 있다. 적폐니 친일(親日)이니 하며 국민을 좌우 양쪽으로 나누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지난 음력 7월 1일(8월 1일)에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제8호 태풍 프란시스코의 북상 소식이 전해졌다. 내일은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광해의 비’가 내릴까.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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