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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태우'의 추억
'물태우'의 추억
  • 제주일보
  • 승인 2019.07.2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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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호 태풍 ‘다나스(DANAS)’가 한라산에 1000㎜ 이상 기록적인 ‘물폭탄’을 쏟아냈다. 도로와 주택침수 등 이곳저곳에 생채기를 남기고 갔다. 
소형 태풍이었지만 장마전선과 겹치며 물 난리가 났던 지난 주말,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노통’이라 불리던 전직 대통령이다.
비가 내리던 어느날.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시중에서 각하를 ‘물태우’라고 부른다”며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질문했다(그 때는 대통령을 각하라고 불렀다).
그러자 ‘노통’은 화도 내지 않고 내 신조는 ‘참 용기’라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며 웃는 게 아닌가.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물’에 대해선 이렇다 저렇다 언급 없이. 당시 13대 국회는 5공비리 청산과 지방자치제 시행, 광주민주화운동 등 산적한 난제로 여야가 대치하고 공전을 거듭할 때였다.
기자들도 웃었다.
“물은 물이로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재임 중 늘 ‘물태우’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전임 대통령과 대비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는 폄하의 의도가 담긴 별명이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좋은 말이다. 요즘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학자들 사이에 나오고 있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보인다.
사람들이 잘 기억을 안해줘서 그렇지, 그는 재임 중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북한에 제안해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1992년 2월)을 이끌어냈다. 또 북방정책으로 적성국이던 소비에트 소련과 중공이라 불리던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했다.
그가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인천공항, KTX, 서해안고속도로, 건강보험 전국민 확대 등이 훗날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에게 비록 ‘12·12 내란’의 주역이라는 오명(汚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학자들이 평가하는 점은 이런 부분들이다.

▲그렇게 보면 어려운 정치 난제를 제나름대로 풀어나간 ‘노통’에게 시중이 붙여준 ‘물태우’란 별명은 어쩌면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선약수’란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고도 그 공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 따라서 거의 도에 가깝다”(上善若手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노자의 도덕경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물 같이 살라고 한다. 물은 형체가 없다. 어떤 상황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한가지로 고정되고 경직된 모습이 아니다. 또한 물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억지로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세상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것처럼 아래로만 흐른다.
이런 물의 모습을 노자는 도(道)의 모습으로 본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정치 현실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다.
흐르지 않으려하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한다. 앞뒤가 꽉 막힌 고집의 정치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의 자질로 ‘미래를 내다보며 현실 변혁’을 지향하는 열정, ‘현실에 대한 정확한 식견’, 결과 책임에 대한 자각을 꼽는다.
지금 한국에 그런 정치가가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 정치인들의 시계(視界)는 100년도 더 먼 옛날 역사 속에 갇혀 있다. 역사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은 역사가이지 정치인의 몫이 아니다.
정치는 내일을 내다봐야 하는 데, 과거만 파 먹고 있으니 안으로도 밖으로도 만물을 해롭게 하는 싸움판이 되고있는 것이다(害萬物而鬪爭).
정말 물처럼 흘러가는 상선약수의 정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걸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생각난 ‘물태우’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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