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 空士 훈적비와 국보 오원철 청와대 경제수석
모슬포 空士 훈적비와 국보 오원철 청와대 경제수석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6.2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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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준 가락회보 편집장 논설위원

‘70년대 중화학공업 기틀 다진 산업화 주역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 별세

지난 531일 중앙 일간지마다 부고기사는 넓은 지면을 차지했다.

그날 바로 반포동 S병원의 장례식장에 갔다. 14호 조문실에서 국화송이로 둘러싸인 고인의 영정을 마주하니 같은 기관에서 근무하다 헤어진 후 40년의 세월이 무상했다.

필자는 1975~79년까지 5년 동안 중화학공업기획단에 근무했다. 단장은 오원철 청와대 경제수석이 겸했다. 70년대 중화학공업정책 추진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진입하게 된 획기적인 산업구조 개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필자는 1908년에 개교한 향리 대정초등학교의 40회 졸업생이다. 지난해 427일 오후로 기억한다. 한 후배의 의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오늘 오원철 수석께서 예고없이 대정초를 다녀갔습니다. 교내에 세워진 공군사관학교 훈적비를 살펴보신 후 대정 현역사 자료전시관을 둘러보셨습니다라고 전했다.

19506·25가 발발하자 1951321일 서귀포시 대정면 상모리 일원에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돼 5년 동안에 강병 50만명을 배출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공군사관학교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김포에서 대전, 대구, 진해를 거쳐 제주도 모슬포로 이전했다. 195121일부터 423일까지 대정국민학교 건물과 운동장을 공사모슬포기지라 부르며 고강도의 훈련에 임했다. 여기서 양성한 공군기간요원 1073명은 우리의 영공을 장악해 한국전쟁사를 빛냈다.

한 때 보라매들의 훈련지 모슬포 공군의 청사는 빛나는 전통과 함께 영원히 기억되리라. 우리 공군은 나가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우리는 하늘에서 살고 하늘에 목숨바쳤다.’ 1987101일 세운 훈적비문의 끝 부분이다.

오원철 전 수석은 훈적비문을 살피면서 아흔살 고령에 눈시울을 붉혔다. 후배의 두손을 잡으며 내가 23세때 여기 공군사관학교 기술사관 1기로 입교했지요. 그래서 68년 만에 찾아왔어요. 참 많이 변하고 발전했군요라고 회고하셨다고 후배는 전한다.

오 수석은 1928년 황해도 송화군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업과를 졸업했다. 공군기술사관으로 임관,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 뒤 국내 최초 자동차회사인 시발자동차 공장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오 수석은 대정초 훈적비와 역사관을 돌아보고는 안덕면 서광리에 있는 자동차박물관에 자신이 만든 국산자동차 1호를 보러 가겠다고 하면서 떠났다.

고인은 한국 기술관료의 효시라고 평한다. 기술직으로 상공부 실장에 이어 차관보를 거쳐 1971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돼 1979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경제발전의 중심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731월 역사적인 중화학공업정책 선언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게 된다.

전국에 중화학공업기지(단지)를 선정했다. 중화학 업종별로 구미(전자), 온산(비철금속), 포항(철강), 거제(조선), 여천(석유화학), 대덕(연구단지), 창원(기계공업) 공업단지의 기반공사는 당시 산업기지개발공사가 시행했다.

창원기계공업단지는 무려 1470만평으로 공업지역과 배후도시(주거 및 상업)로 구분, 조성됐다.

1970년대 후반 박 전 대통령이 창원공단 시찰을 마친 후 귀경길에 수행원과 기자들 앞에서 오원철은 국보야라고 치켜세운 일화를 모두 기억한다.

지난 530일 영면한 오원철 전 경제수석에 대해 언론마다 한국경제 설계자, 조국근대화 꿈 이루고 잠들다. 떠나가는 한강의 기적 주역들이렇게 표현하며 추모했다.

고 오원철 수석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드리면서 111주년을 맞이한 모교 대정초등학교, 공사의 훈적지로 자랑스럽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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