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날 벗에게서 뜬금없는 전화가 왔다. 한 시간 후면 제주에 도착한다는 얘기였다. 이리 갑작스레 오는 게 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공항에 나가보니 의외로 표정이 밝았다.
그냥 쉬러 왔다는 그 친구의 말에 일단 안심을 하고 어디 가고픈 데가 있나 물으니 그냥 발길 따라 가잔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도 좀 낀 날이라 정처 없이 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갤러리 두모악 근처였다. 오늘 같은 날씨엔 거기도 괜찮겠다 싶어서 타진해 보니 마침 그 친구도 안 가본 곳이란다.
이미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는 필자는 익숙함을 핑계 삼아 건성건성 둘러보고 있는 데 그 친구는 조금은 진지하고 자세하게 살펴보는 걸 보고 오길 잘했다 싶었다.
그러다 어느 작품 앞에 이르자 그 친구는 발길을 멈췄다. 한동안 꼼짝하지 않는 그 친구가 조금 이상해서 다가가 보니 뜻밖에도 울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풀과 나무가 찍힌 사진 앞에서 사내가 눈물을 보이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왕 시작한 거 실컷 울라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 10여 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친구는 예의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 마음이 뭐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날 그 곳에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처음 보는 작가의 사진 작품 앞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 친구의 감수성과 자신의 작품을 처음 본 사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 그 작가 모두에게 말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 곳에 다시 가거나 그 작가의 책들을 만나게 되면 내 가슴 속 깊은 어딘가로부터 밀려오는 먹먹한 그 뭔가가 생겼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82년부터 제주에 드나들었고, 1985년부터는 아예 정착해서 제주의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바람과 억새 등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했던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괴로움은 작업하며 견딜 수 있지만, 필름이 없어 작업을 못하는 서글품만은 참지 못한다’고 했던 그는 허기진 배를 ‘당근, 무, 고구마 밭을 스쳐 지날 때면 주위를 살핀 후에 슬쩍해서’ 달랬다고 고백하고 있다.
‘끼니는 굶어도 꿍쳐둔 돈 톡톡 털어 일 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가졌’고, ‘사람들의 평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준비하지만 어느 누구도 일부러 초대하지는 않’았다는 그는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끼니와 필름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을 무렵, 불행히도 루게릭병을 얻어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었지만 ‘사진 대신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아 그 열정을 쏟아 만든 것이 갤러리 두모악이다.
그가 남긴 자전적 에세이집으로는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하날오름 1996)와 '그 섬에 내가 있었네'(Human & Books 2004)가 있다. 두모악 가기 전에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갑자기 그 울보 친구가 보고 싶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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