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에 예술혼 담은 사진작가와 친구의 눈물
앵글에 예술혼 담은 사진작가와 친구의 눈물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6.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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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의 자전석 에세이집들
그 섬에 내가 있었네(Human & Books 2004) 표지
그 섬에 내가 있었네(Human & Books 2004) 표지

몇 년 전 어느 날 벗에게서 뜬금없는 전화가 왔다. 한 시간 후면 제주에 도착한다는 얘기였다. 이리 갑작스레 오는 게 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공항에 나가보니 의외로 표정이 밝았다.

그냥 쉬러 왔다는 그 친구의 말에 일단 안심을 하고 어디 가고픈 데가 있나 물으니 그냥 발길 따라 가잔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도 좀 낀 날이라 정처 없이 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갤러리 두모악 근처였다. 오늘 같은 날씨엔 거기도 괜찮겠다 싶어서 타진해 보니 마침 그 친구도 안 가본 곳이란다.

이미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는 필자는 익숙함을 핑계 삼아 건성건성 둘러보고 있는 데 그 친구는 조금은 진지하고 자세하게 살펴보는 걸 보고 오길 잘했다 싶었다.

그러다 어느 작품 앞에 이르자 그 친구는 발길을 멈췄다. 한동안 꼼짝하지 않는 그 친구가 조금 이상해서 다가가 보니 뜻밖에도 울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풀과 나무가 찍힌 사진 앞에서 사내가 눈물을 보이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왕 시작한 거 실컷 울라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 10여 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친구는 예의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 마음이 뭐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날 그 곳에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처음 보는 작가의 사진 작품 앞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 친구의 감수성과 자신의 작품을 처음 본 사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 그 작가 모두에게 말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 곳에 다시 가거나 그 작가의 책들을 만나게 되면 내 가슴 속 깊은 어딘가로부터 밀려오는 먹먹한 그 뭔가가 생겼다.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하날오름 1996) 초판 2쇄 표지의 저자 사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82년부터 제주에 드나들었고, 1985년부터는 아예 정착해서 제주의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바람과 억새 등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했던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괴로움은 작업하며 견딜 수 있지만, 필름이 없어 작업을 못하는 서글품만은 참지 못한다’고 했던 그는 허기진 배를 ‘당근, 무, 고구마 밭을 스쳐 지날 때면 주위를 살핀 후에 슬쩍해서’ 달랬다고 고백하고 있다.

‘끼니는 굶어도 꿍쳐둔 돈 톡톡 털어 일 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가졌’고, ‘사람들의 평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준비하지만 어느 누구도 일부러 초대하지는 않’았다는 그는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 했다’고 한다.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하날오름 1996) 초판 속지 속 저자 친필 서명.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하날오름 1996) 초판 속지 속 저자 친필 서명.

그런 그가 끼니와 필름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을 무렵, 불행히도 루게릭병을 얻어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었지만 ‘사진 대신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아 그 열정을 쏟아 만든 것이 갤러리 두모악이다.

그가 남긴 자전적 에세이집으로는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하날오름 1996)와 '그 섬에 내가 있었네'(Human & Books 2004)가 있다. 두모악 가기 전에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갑자기 그 울보 친구가 보고 싶어지는 오늘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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