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꽃 인사
수국꽃 인사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6.1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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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오랜만에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마음은 이미 종달리 해안도로를 향해 가고 있다. 비를 머금고 새침하게 피어 있을 수국꽃이 눈에 선하다. 해마다 비가 오면 수국꽃이 핀 해안도로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버릇이 있다. 글이 읽히지 않는 날이 많아지거나, 말 못 할 걱정거리가 있을 때 무연히 걷다 보면 어느새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어 꼭 찾는 힐링 코스이다.

흙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색을 뽐내는 꽃을 기대하며 당도했다. 하지만 복스럽게 핀 수국은 기억 속에만 저장되어 있고, 초라한 모습으로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보니 실망감이 컸다. 거센 바람에 줄기는 꺾이고 꽃은 푸석하게 말라 있다. 누군가에 의해 길가에 무참히 버려진 꽃을 보니 마음 설레며 먼 곳을 달려온 게 무색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수국이 양쪽 길에 가득했다. 하지만 자전거도로를 만든다고 한쪽의 수국을 모조리 없애 버려 내내 아쉬웠다. 남아 있는 꽃마저 바람에 쓰러지고 초라하게 피어 있어 속상한 마음에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비가 내리는데도 해녀들이 자맥질하면서 내뱉는 숨비소리가 귀에 정겹다. 자세히 들어 보니 길지 않고 짧게 끝난다. 물질을 잘하지 못하는 해녀가 아닐까? 제주 여인 아니랄까 봐 혼자 지레짐작하고 있는 나를 본다. 소소한 즐거움이다.

빗방울을 머금고 무리 지어 핀 갯메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울새 소리와 직박구리 소리도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괜히 왔나 싶었던 마음이 일순에 사라진다. 고개를 돌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거센 바람과 가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국꽃이 해안풍경에 어우러져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내리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으며 너른 잎새에다 지금 이 풍경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소망을 담아 이해인 수녀의 시를 찬찬히 새겨본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푸른 한 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 무더기로 쏟아지네

-이해인 수녀의 수국을 보며’-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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