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의 은총
산티아고 순례의 은총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6.12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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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 전 제주일보 논설고문·논설위원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조가비를 매달고 끝없이 걷고 있는 길이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의 꿈과 희망이 되고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야곱 성인의 유해가 있는 스페인 서북부의 산티아고 대성당을 목적지로 삼아 800를 걷는 순례이다.

눈부시도록 새파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의 밀밭. 코알라가 즐겨 먹는다는 유칼립투스의 진한 향. 꽃이 핀 들판과 숲으로 우거진 피레네산맥.

매일 만나야 하는 자갈길마저 자신에게 마련된 특별한 포장길처럼 멋져 보이는 그 곳. 자기 키만큼 큰 배낭의 무게가 힘들어 보여도 낭만으로 가득한 순례길. 낯설게 다가오는 중세풍의 낡은 도시들도 나를 위해 준비한 것처럼 보인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30여 일간의 여정이라면 더욱 멋진 여행이 될 것이다. 내 고향 제주의 올레길이 산티아고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길임을 알고 떠난다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런 길이라면 눈이 와도 좋고 비가 와도 좋아 보인다. 고행은 자기를 재충전하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순례는 반드시 고행과 외로움, 두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다. 한 마디로 고생이었다.

하루 평균 25, 그것도 한 달여를 쉬지 않고 걸어야 하며 매일 소량의 빵뿐인 부실한 식사와 열악한 알베르게 숙소를 견뎌야 한다. 빨래 기회를 놓치면 쉰 냄새가 몸에서 가시지 않아 그야말로 거지꼴이다.

자갈과 돌길의 비포장도로는 발가락마다 물집을 증거로 남긴다. 언제 무릎에 이상 신호가 올지 모를 육체에 대한 걱정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눈보라 강풍에다 비를 동반한 날씨를 운 좋게 비켰다면 지상의 모든 것을 녹일 듯한 스페인의 뜨거운 햇빛을 또한 피할 수 없다. 길과 잠자리와 먹을 것이 부족했던 옛날의 순례는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제집으로 돌아오려면 수백 를 다시 걸어야 하는 상상 이상의 고행길이었다.

나는 단체에 속해 지난달 산티아고 순례에 나섰다. 개인과 단체 순례는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 나는 나이가 있어 항공편과 숙소 예약이 쉬운 단체 순례를 택했다. 걷는 길은 똑같다. 일단 숙소를 나서면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러기에 개인 순례자처럼 길을 잃기도 하고 혼자 길섶에 앉아 빵으로 허기를 때우는 일이 태반이었다.

다음 도착지의 숙소를 직접 찾아야 하는 개인 순례자들의 수고와 달리 예약 없이 알베르게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편한 순례를 했다면 할 말은 없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한 달여를 매일 비좁은 공간 속에서 다른 이와 함께 해야 하는 단체 순례는 개인 순례에서 볼 수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정신적인 피로가 가장 힘들었다. 상대에 대한 탐색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개개인의 성격과 행동으로 서로 부딪치고 풀어야 하는 긴장은 순례 내내 계속됐다.

사람들은 산티아고를 가리켜 용서와 화해, 치유의 길이라고 부른다. 산티아고에는 다른 일반 여행과 달리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순례에 나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30여 일은 소중한 시간이다. 길이 주는 특별한 성찰의 은총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과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내가 가진 것들 모두가 하찮은 것이며 그 하찮음은 자신을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의 길로 나아가게 해준다.

길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나 자신이다. 오로지 앞만 보고 살아왔던, 그리고 이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절박하면서도 절실한 질문에 대한 답을 그 곳에서 조금이라도 얻어 올 수 있다면 당신의 산티아고 순례는 성공한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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