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던 순간의 빛이 바래지더라도
찬란하던 순간의 빛이 바래지더라도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6.0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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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숙 제주지방법원 가사상담 위원·백록통합상담센터 공동소장

찬란씨는 수도권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과 회사 생활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제주로 출장왔는데 그 때 눈 앞에 펼쳐진 풍광이 너무 좋아 결혼하면 제주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수도권 생활 중 찬란씨는 한 눈에 반한 상대인 순간씨를 만나게 되고 서로 결혼을 약속했다. 찬란씨는 제주 삶을 제안했고 순간씨도 흔쾌히 동의했다.

꿈에 그렸던 둘만의 시간은 현실에서는 녹록지 않았다. 결혼 생활도, 제주 생활도 처음인 둘은 갈등이 심해질 때마다 외로움도 깊어졌다.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났고 양육 부담까지 더해져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냈다. 순간씨는 맞벌이를 하는데 자기만 독박 육아를 한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어 어느 날 육지 친정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리고 찬란씨에게 앞으로 아이를 보고 싶으면 육지로 와서 보고 자신은 더 이상 제주에 내려가지 않겠다며 일방적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문자 메시지를 본 찬란씨는 부랴부랴 함께 살던 집으로 달려갔는데 순간씨와 아이의 옷이며 생활용품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순간씨는 남편이 육지로 당장 달려와 제발 제주로 함께 내려가자며 용서를 빌 줄 알았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자 배신감을 느꼈다. 찬란씨도 하루만 지나면 아이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한다며 아내가 자기에게 전화를 해대고 이틀만 지나면 도저히 안 되겠다며 아이를 데리고 제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소식조차 없자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무력감을 느꼈다.

순간씨는 오랜 고민 끝에 법원에 아이 양육을 주장하며 이혼 재판 청구를 했고, 그 이혼 소장을 받은 찬란씨 역시 아이 양육을 주장하며 반소를 제기했다.

이혼에 대한 이들 부부의 마음을 확인한 법원은 아이 양육은 누가 할 것인지, 따로 사는 부모는 어떻게 아이와 교류(면접교섭)할 것인지 등을 논의하고 아이는 과연 부모 이혼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심리 전문가와 만날 것을 요청했다. 부모 입장에서 양육이나 면접교섭을 주장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이 입장에서 결정하도록 상담을 의뢰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찬란씨와 순간씨, 그리고 아이 사랑이를 상담실에서 만나게 됐다.

사랑이네 가족의 가장 큰 어려움은 아빠는 제주에, 사랑이와 엄마는 육지에 있어서 잦은 면접교섭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장기간 별거로 부부가 의사소통을 완전히 단절해 서로 자발적으로 면접교섭을 위해 연락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찬란씨와 순간씨에게 SNS 단체대화방을 통해 문자와 음성으로 상호작용을 하도록 제안했고, 이들은 그 제안에 따랐다.

필자는 서로에 대한 미움에 몰두하다 보니 자녀인 사랑이가 어떤 마음일지를 놓쳤다는 것을 이들에게 알리고 최우선으로 사랑이와 아빠의 만남부터 주선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는 부모가 서로 SNS 대화방에서 논의하도록 했는데, 이 때 서로 존댓말을 쓰도록했다. 갈등이 심할 때는 존댓말을 쓰는 것이 갈등 상승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결국 만났고, 필자는 그 만남 이후에 서로 이 시간을 도모한 것에 대한 격려와 축하를 했다. 이러한 시간을 통해 함께 하기 싫은 배우자와 상담을 받고 면접교섭을 위해 연락을 하는 등 귀찮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단순히 법원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부모로서 성숙해지기 위해 겪어야 하는 하나의 성장통이라는 것을 이들은 알게 됐다.

어쩌면 사랑이는 이제 영영 부모와 함께 한 집에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확인한 사랑이는 비록 따로 살더라도 자신이 아플 때, 슬플 때, 실패할 때, 외로울 때 부르고 기대고 싶은 존재가 바로 부모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찬란씨와 순간씨도 상담을 받은 후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를 자주 떠올리며 한 때 미워하고 원망했던 상대를 이해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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