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5-19 20:54 (일)
봄은 밤사이에 자란다
봄은 밤사이에 자란다
  • 제주일보
  • 승인 2019.05.07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희 시인

시누이 첫 기일을 지내기 위해 천안엘 다녀왔다.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다행히도 고사리가 일찍 올라와 며칠을 꺾은 덕에 육지 사는 시누이 모두에게 한 근씩은 가져다줄 수 있었다. 가져간 고사리를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무치는데, 시누이 두 분이 예쁜 옷 사 입으라며 돈 봉투를 건넨다. 해마다 고사리를 보내주니 고마운 마음의 표시란다.

순간, 힘들게 꺾은 정성을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동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십년은 재능기부 하겠노라 약속을 해버렸다. 고사리 하나 꺾을 때마다 절을 해야 하고, 가시덤불 속 고사리를 꺾다 보면 여기저기 찔리고 긁히는 일이 다반사다. 집에 오면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삶고 말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깜빡 잊고 말았다.

일찍 집을 나서야 남들이 지나가지 않은 곳에서 조금 더 꺾을 수 있기에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내게는 아마도 일 년 열두 달 중에 제일 바쁘게 사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일까? 유독 고사리 철이면 나를 찾는 지인들의 전화가 잦다. 때로는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준다는 고사리밭을 알려달라고 물어 오기도 한다.

열심히 꺾어서 어디에 쓸 거냐고 물어오는 이도 있다. 예전에 어머니는 깔끔한 성격답게 고사리도 정성스레 꺾으셨다. 나이 앞에 장사 없다고 이제는 나에게 부탁하신다. 당신 것만 주문하면 좋은데 부산 사는 외삼촌 몫까지 얹어서 예약이다. 나도 나름대로 바쁜데 어머니 보시기엔 언제나 한량 같은가 보다. 흔쾌히 답변할 일은 못되기에 머뭇거리면 팔아달라고 하신다. 결국 완전한 나의 패배다. 우리 집 제사, 시누이 넷, 친정엄마, 외삼촌, 그리고 마음은 있어도 꺾어오지 못하는 지인들에게 나눠 주다보면 부지런히 꺾어도 늘 빠듯하다.

예전에는 나만의 고사리밭을 꽤 많이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몇 군데 되질 않는다. 농지로 개간하여 없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골프장이 들어서고 웃뜨르 마을까지 타운하우스가 들어서서 덤불숲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입지가 점점 좁아져서 걱정하는 찰나 다행하게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최상의 장소를 발견했다. 일행을 찾느라 목청 높이지 않아도 되며, 가시덤불 틈으로 들어갈 일도 없다. 시야가 확 트여서 어디로 나가야 할지 헤맬 필요도 없다. 맨 처음 고사리를 알려 주었던 형님이 또 나를 인도한 걸까.

갓 시집와 철모르는 나에게 형님은 아득히 높고도 자상한 스승이었다. 제사에 올릴 고사리는 본인이 정성으로 꺾어야 한다며 고사리가 많다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른 새벽 현장에서 선수가 되는 비법을 전수하셨다. “고사리를 꺾는 순간 눈은 다음 꺾을 고사리를 보고 있어야 한다.” . 크고 작은 삶의 지혜도 알려 주셨는데, 시집살이 힘들어도 고사리처럼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고 살면 별 어려움 없을 거라 하셨다. 해마다 들녘에 고사리 아른거릴 때면 형님의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와 내 눈가를 적신다.

정신없이 꺾다가 커피 한잔 마시며 한숨 돌리자니 새우란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새내기 동서를 챙기던 형님의 마음같이 따스한 봄바람이 새우란 향기를 싣고 내게로 와 속삭인다. 세상살이 어려울 때마다 고사리처럼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라고.

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